'사과상자'부터 '비타 500박스'까지 변천사
'뇌물 상자'가 날로 진화(?)하고 있다. 최근 정치권을 강타한 '성완종 파문'에선 '비타500 상자'가 등장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수표 대신 현금을 남몰래 전달하고자 탄생한 '뇌물 상자'의 변천사를 들여다봤다.
사과 상자는 '뇌물 상자'의 원조다. 사과 상자는 1만원권으로 가득 채우면 최대 4억 원(보통 2억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1997년 '수서 비리 사건'이 꼽힌다. 당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사과 상자(2억4000만 원)와 라면 상자(1억2000만 원)로 100억여 원의 검은돈을 은행장과 정·관계 인사들에게 뿌렸다.
2002년 한나라당이 '차떼기'로 대선자금을 받았을 때도 40여개의 사과 상자가 쓰였다. 당시 한 재벌기업이 고속도로에서 100억 원이 넘는 돈을 트럭 째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에 전달한 사실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차떼기당'의 유래다.
사과 상자의 유명세에 특산물 상자를 애용하기도 했다. 2005년 한국마사회 비리 사건에는 안동 간고등어와 상주 곶감 상자가 등장했다. 당시 검찰 조사에 따르면 한국마사회 윤영호·박창정 전 회장은 뇌물을 받을 때 안동 간고등어 상자(3000만 원), 상주 곶감 상자(2000만 원), 초밥 도시락통(300만 원)을 이용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때론 골프 가방과 명품 가방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골프 가방에는 1~3억 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골프 가방은 2001년 '진승현 게이트' 의혹이 불거지면서 등장했다. 당시 진승현 MCI코리아 부회장이 측근 인사 등을 통해 수억 원의 현금을 골프 가방에 넣어 서울시내 특급호텔 객실 등에 배달시켰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와 관련 검찰은 진 부회장의 총선·로비자금 리스트 등과 관련 내사에 착수했으나 정·관계 로비설 등을 속 시원히 밝히지 못했다.
'은밀한 로비' '뇌물 상자'는 19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되면서 수표 대신 현금을 남몰래 전달하기 위해 탄생했다./더팩트DB |
2012년 현영희 전 새누리당 의원의 수행비서였던 정모 씨는 지난 5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지난 3월 15일 현 의원으로부터 3억원을 받아 은색 쇼핑백에 담은 뒤 조 씨에게 건넸다"며 "조 씨는 (명품 브랜드) L 가방에 (돈을) 옮겨 담고 현 전 의원과 통화한 뒤 전달하러 갔다"고 제보했다. 이 제보로 현 전 의원은 의원직을 상실했다.
'뇌물 상자'는 2009년 5만 원권이 나오면서 변화를 맞는다. 부피가 1만 원권에 비해 5분의 1로 줄어들어 더 이상 사과 상자가 필요 없게 됐다. 이때부터 등장한 것이 쇼핑백이다. 쇼핑백은 종류에 따라 1~5억 원까지 담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정·관계 로비 혐의로 구속 기소된 모 부산 건설업자는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A사 넥타이 쇼핑백을 사용했다.
평범한 생활용품을 '뇌물 상자'로 이용하기도 한다. 지난 1월 25일 검찰이 발표한 가전업체 모뉴엘의 수천억 원대 사기 대출 사건에서 모뉴엘은 무역보험공사·한국수출입은행의 담당자 등에게 50만 원짜리 기프트카드를 담뱃갑에 넣었고, 과자·와인·티슈 상자에 5만 원권 현금을 담아 건넨 것으로 조사됐다.
가장 최근엔 선물용 음료수 상자가 '신(新)'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박스에는 5만 원권으로 약 8000만 원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2013년 4·24 재선거를 앞두고 서울에서 승용차에 '비타 500 박스'를 싣고 이완구 국무총리의 부여 선거사무소를 방문해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앞서 성 전 회장은 생전 인터뷰에서 이 총리에게 3000만 원을 건넸다고 주장했고, 이 총리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더팩트 ㅣ 오경희 기자 ari@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