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나아가야할 길' 동북아는 머잖아 폭풍우가 몰아칠 기세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확고한 주관과 줏대로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최진석 기자 |
동북아에 바람이 인다. 마치 태풍전야의 미풍처럼 산들거리지만, 머잖아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폭풍우가 몰아칠 기세다.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한다. 휘말려 날아가지 않으려면 '중심'을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보다 확고한 주관과 줏대가 있는 중심(中心), 가볍게 처신하지 않는 태산 같이 중심(重心), 그리고 대중의 마음을 꿰는 중심(衆心)이 필요한 것이다.
올해는 한국의 광복 70주년, 일본의 패전 70주년이다. 세월이 흘러 달라진 건 미일동맹이다. 미국에 선전포고했던 일본은 패전을 딛고 어제의 적과 굳건한 동지가 됐다.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사포처럼 껄끄러운 한일관계이다. 지정학적인, 역사적인 문제가 있겠지만,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자.
한자로 풀이하면 한국은 '사(士)'의 문화, 일본은 '시(侍)'의 문화다. 우리가 선비정신을 앞세운다면, 일본은 말 그대로 사무라이정신이다.
선비정신은 한자의 모양도 그렇듯이 머리를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세운다. 남산골 딸깍발이는 얼어 죽어도 곁 불은 쬐지 않으며, 굶어도 동냥하지 않는다. "나물을 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웠으니…" 사나이 대장부 살림살이가 이만하면 족한 것이다. 뒤주에 쌀이 있는지 없는지 알면 선비가 아니며, 냉수를 마시고도 이쑤시개를 꺼내 드는 것은 허세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배려일 것이다. 사무라이정신은 한자 뜻 그대로 '모시는' 정신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선비는 기개(氣槪)와 절의(節義)를 말하지만, 사무라이는 절대복종(絶對服從)이 미덕인 것이다. 그래서 선비는 옳고 그름에, 사무라이는 역학 관계에 목숨을 바친다. 선비가 임금에게 "아니 되옵니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사약을 받을 때, 사무라이는 "카시코마리마시다(분부대로 하겠습니다)"며 고개 숙여 배를 가르는 것이 아닐까.
일본이 패전의 수치를 잊고(어쩌면 극복하고) 미국에 종속적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이하는 것은 '모시는(侍)' 문화, 바로 힘의 논리가 우선하는 사무라이정신이 바탕인 것으로도 비친다. 반면 우리가 일본과 여전히 과거사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꼿꼿한 선비정신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일본이 선비정신을 이해한다면, 말 한마디로 묵은 천냥 빚을 일거에 해소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선비와 사무라이의 차이도 정원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한국의 정원은 비원(秘苑)에서도 보듯이 자연 그대로를 최대한 살린다. 전국 곳곳의 정자도 마찬가지 개념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것이다. 바로 차경(借景)이다.
일본은 자연을 가둔 상태에서 상징적으로 축약한다. 예컨대 교토의 료안지(龍安寺)의 정원이 대표적인데, 물이 없이 돌과 모래로 바다와 육지를 나타낸다. 가레이산스이(枯山水) 양식이라고 하는데, 봉사이(盆栽)와도 일맥 상통한다.
'강을 만나면 건너야 한다' 한국과 일본은 각각 광복과 패전 70년을 맞았지만 한일관계는 여전히 사포처럼 껄끄럽다. 지금 한국은 '대천(大川)'을 건너는 상황이다. 강의 이편을 차안(此岸), 저편을 피안(彼岸)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문병희 기자 |
여하튼 한국도 일본도 광복과 패전 70년을 맞아 또 하나의 강(江)을 건너려는 상황이다. 이를 주역의 '대천(大川)'이라 부를 수도 있다. 그에 앞서 먼저 강의 원관념부터 짚어보자.
중국에서 황하(黃河)는 아버지 강, 장강(長江·양자강)은 어머니 강으로 부른다. 황하는 중국문명의 요람이자 수많은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한 무대이다. 가수 김세레나가 부른 '성주풀이'는 "낙양성 십리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로 시작하는데, 이 곳이 바로 황하가 비껴 흐르는 망산의 북쪽, 북망산(北邙山)이다. 죽으면 간다는 곳이다. 여기에 묻힌 제왕과 제후가 모두 200명이라고 한다. 지금도 북망산 아래는 황톳빛 황하가 굽이치는데, 강의 범람으로 산이 깎여나갔다가 다시 침전물이 쌓이기를 반복한다. 땅속에 묻혔지만, 홍수가 나면 쓸려나가면서 어복(魚腹)에 장사를 지낸 셈이 된다.
북망산에서 황하를 건너면 용문석굴이다. 동굴이 1352개, 불감이 785개가 새겨져 있다. 생자(生者)에게는 오늘의 거울이요, 사자(死者)에게는 저승에서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는 듯하다. 여기에서 황하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며 흐른다. 강의 이편을 차안(此岸), 저편을 피안(彼岸)이라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기독교인들이 "요단강 건너서 만나리~"라며 찬송할 때, 강 건너 저편은 피안이자, 약속의 땅이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동시에 천국의 원관념이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건너가는 망각의 강 '레테(Lethe)'이다. 근래 영화가를 강타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란 영화 제목의 '강'도 같은 의미 아니겠나.
생명의 근원인 강은 이렇게 죽음을 품고 흐른다. 마치 생사일여(生死一如)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강을 건너는 것은 종종 죽음을 불사하는 경우가 있다. 루비콘강을 건넌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했을 때, 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떠난다는 선언이다. 차안에서 피안으로 갈 수 있지만, 피안에서 차안으로 되돌아올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주역에서도 섭대천(涉大川), 즉 '큰 내를 건넌다'는 말이 종종 나오는데, 건곤일척의 모험을 상징한다. 예컨대 수(需)괘는 '확신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는 것은 밝은 빛이 길을 여는 것과 같아 그 끝이 길하다. 따라서 큰 내를 건너는 것(모험)이 이롭다(需 有孚 光亨 貞吉 利涉大川)'고 풀이한다.
반면 송(訟)괘는 '정치인은 신뢰와 청렴과 불편부당으로 처세하면 길하지만, 정치의 끝은 역시 흉(凶)하다. 소통과 조언이 필수적이며, 새 세상을 열기 위한 모험은 불리하다(不利涉大川)'고 풀이한다.
쉽게 풀이하면, 수(需)괘는 '강태공이 빈 낚시로 세월을 낚는 것처럼 '기다림의 미덕'을 익히면 마침내 천시(天時)를 얻어 대업(大業)을 이룬다'는 뜻이다. 송(訟)괘는 '큰 정치는 민심을 제대로 읽고 두려워하며, 백성의 목숨을 담보로 모험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큰 강은 눈물은 물안개가 아닐런지' 큰 천은 작은 빗물이 모여 이뤄진다. 그 작은 빗물은 마른 하늘에 비를 고대하는 서민들이 아닐까./문병희 기자 |
결국 기다림과 조급함이 대업을 이루느냐, 실패하느냐를 가른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으로의 행로가 이롭든 불리하든 그 경계에는 '큰 내를 건너는(涉大川)' 결단이 자리하는 것이다. 이처럼 삶과 죽음을 품고 가르는 강(大川)은 본디 정치적이다.
지금 한국은 '대천(大川)'을 건너는 상황이다. 강을 건너는 것이 유리한지, 불리한지 따져보는 것은 이미 의미가 없다. 솥을 부수고 배를 가라앉히는 '파부침주(破 釜沈舟)'의 각오로 맞서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한데, 앞서 거론한 세 가지의 중심, 즉 중심(中心)·중심(重心)·중심(衆心)이 그 바탕이다.
대천(大川)이든 큰 강이든 빗물이 모여 이뤄진다. 주역에서 빗물은 인생에서의 작은 성공이나 행복을 의미한다. 그런데 팍팍해진 살림살이에 힘겨워하는 서민들은 그야말로 자그마한 성공이나 행복도 얻기가 쉽지 않다.
주역의 소축(小畜)괘는 작은 것을 기른다는 뜻인데, 가정을 기초로 한 작은 행복을 가르친다. '작은 성공과 행복도 일찍부터 노력해야 하며, 큰 욕심 버리고,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이웃과 화목하면 이룬다'고 한다. 그런데 '먹구름이 몰려와도 비가 오지 못하는(密雲不雨)', 즉 상대적으로 쉬운 작은 성공과 행복을 얻지 못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고 지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즘의 서민은 밀운불우(密雲不雨)가 아니라 ‘마른 하늘에 비를 고대하는 무운기우(無雲祈雨)의 형국이 아닌가. 봄 가뭄에 서민경제가 목마르다.
그런데 소축(小畜)과 달리 대축(大畜)은 역시 '큰 내(大川)'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가족을 돌보지 못하는(不家食)' 희생이 필요하단다. GE의 잭 웰치가 이혼을 거듭하거나, 성공한 CEO들의 가정이 꼭 행복하지만은 않은 것이 이 때문일까. 대유(大有)는 지금으로 말하면 재벌쯤인데, '타고난다((元亨)'고 했다. 하지만 이들 재벌도 쓴 소리하는 친구를 사귀고, 겸손과 검박(儉朴)해야 길(吉)하다고 충고한다. 서민과는 동떨어진 이야기니 그저 소축(小畜)의 지혜, 한마디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을 실천하면 되지 않을까.
[더팩트ㅣ박종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