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 '밀실 정치'의 산실로 불린 선운각(요정) 얼굴 마담이 총상을 입은 채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의 이름은 정인숙 씨. 세상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정 씨의 가방에서 나온 수첩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곳을 드나들던 정·재계 거물의 프로필이 담긴 '정인숙 리스트'였습니다. 권력 실세들의 검은 뒷거래, 그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지요.
밀실 접대는 해방 정국의 요정(고급 요릿집)에서 시작해 '룸살롱'으로 장소를 바꿔 지속돼 왔습니다. 2002년 검찰 수사로 도마에 오른 연예기획사의 방송 관계자 룸살롱 접대는 2009년 고 장자연 씨가 유명을 달리하면서 '장자연 리스트'로 드러났지만,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검은 역사'는 지치지도 않고 반복됩니다. 2010년 4월 MBC 'PD수첩'은 부산 지역 건설업자의 제보를 근거로 전현직 검사 수십 명이 금품과 룸살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습니다. 이른바 '스폰서 검사' 사건입니다. 이후에도 '벤츠 검사' '그랜저 검사' 등 검사가 청탁을 받고 고급 승용차 등을 받은 의혹이 잇따라 터졌습니다.
공교롭게도 세 사건의 무대는 밀실이며 '권력과 성(姓)' 이 맞물려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제대로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대가성'과 '직무관련성'이 있어야 뇌물로 인정되는 형법 조항 때문입니다. 값비싼 저녁 식사와 술자리, 골프 접대, 용돈, 명절 떡값 등 명목도 다양한 각종 접대가 끊이지 않는 이유입니다.
'김영란법' 탄생의 배경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2011년 6월 당시 김영란 국민권익위원장은 '공직자 청탁수수 및 사익추구 금지법'을 추진하겠다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2012년 8월 정식으로 입법예고 됐고, 우여곡절 끝에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2년 7개월여 만입니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공직자가 100만 원 이상의 금품을 수수하면 직무관련성과 관계없이 형사처벌하며, 100만 원 이하여도 직무관련성이 있다면 과태료를 물어야 합니다. 그런데 왤까요. 겨우 통과한 법안을 놓고 벌써부터 부작용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통과하는데 중점을 두다 보니 여기저기 '허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만 꼽자면 예외 조항 탓에 빠져나갈 '구멍'이 있습니다. 국회를 통과한 김영란법은 사교나 경조사 등 부조를 위한 금품은 대통령령이 정한 금액(식사 접대 3만 원까지, 경조사비 5만 원까지)을 허용하도록 했습니다. 액수를 얼마로 정하느냐에 따라 불법과 합법이 갈리는 만큼 금액기준도 적잖은 논란이 예상됩니다.
4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로비. 지역 특산물인 배 상자 30여개가 의원실 보좌관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명절이면 흔한 풍경이지만, 김영란법이 통과된 다음 날이어선지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문득 저 배 한 상자는 얼마며, 누가 보냈는지 궁금했습니다. 만약 저 배 상자를 선물한 목적이 청탁이 아닌 '사교'이며, 5만 원을 넘지만 않는다면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홈쇼핑처럼 끝자리를 9로 맞추는 '4만9999원' 선물이 유행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영란법 유예기간은 1년 6개월입니다. 압박하려 할수록 일탈하고, 양성화하면 음지로 찾아드는 게 우리 사회의 단면입니다. 당장 상류층이 드나드는 룸살롱 업주들은 김영란법을 비웃는다고 합니다. "접대비를 현금으로 지불하면 단속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요. 김영란법으로 공직자의 '부정부패'는 정말 사라질까요?

[더팩트 ㅣ 오경희 기자 ari@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