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피라미드형 정권의 꼭지점 박근혜 대통령도 외로울 것이다.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공자가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박 대통령도 밤새 서류를 읽고 장관들에게 깨알지시를 하는지도 모른다./더팩트 DB |
[더팩트 | 박종권 편집위원] 세계의 정신적 스승, 부처와 공자와 예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2013년 6월 30일 ‘21세기 북스’에서 세 권의 책을 냈다. ‘슬픈 붓다’’슬픈 공자’’슬픈 예수’가 그것이다. 이 분야에 관해 당대의 전문가들에게 의뢰해 지은 책인데, 제목이 눈을 끌어당겼다. 모두 ‘슬픈~’으로 묶은 것이다. 윤회의 사슬을 끊고,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를 세우고, 사랑으로 구원 받는 길을 제시한 위대한 스승들이 모두 슬프다니 왜일까.
우선 표지의 부제를 보자. 붓다는 ‘세상 밖에서 공동체를 꿈꾼 이상주의자’라 했다. 공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위대한 스승의 서글픔’이다. 예수는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로 표현했다. 종합하면 이들 정신적 스승은 세상 밖에서 공동체를 꿈꿨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으며, 저항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슬프다는 뜻일 게다.
책의 내용도 이 부제를 확대 부연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런데 과연 세상 밖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공동체를 꿈꾸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알아주며,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이 아니라 순응의 길을 걸었더라면 슬프지 않았을까.
순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세 스승이 공통적으로 슬픈 이유, 바로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셋 모두 부모형제는 있다. 예수 역시 역사적으로 그렇다. 추종자도 많다. 적게는 12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른다. 이들은 존경하고 섬기며 목숨까지 바친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세 스승 모두 ‘친구’가 없다. 가르치거나, 이끌거나, 깨우쳐야 할 민중과 백성과 중생들 속에서 홀로 우뚝 서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따르면 어느 날 공자가 노자를 찾아간다. 훌륭하다는 말을 듣고 어쩌면 일방적으로 가르치거나 배우는 스승과 제자 관계가 아닌 친구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노자는 ‘고니는 희고, 까마귀는 검다’며 내친다. 공자가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통해 인생살이에서 옳고 그름과 좋고 나쁨을 구분하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흰 것이 좋고 검은 것이 나쁘다면, 고니는 항상 선하고 까마귀는 악한가. 본디 그렇게 태어난 것인데 어쩌란 말이냐. 흑백은 선악이 아니다. 그냥 두어라. 바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머쓱해진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말한다. 노자는 마치 용과 같아서 가늠하기 어렵다고. 아마도 공자는 깊은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뭔가 통할 것 같았는데, 그래서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시쳇말로 ‘까인’ 것이다. 그러한 심경이 논어(論語)의 첫머리 학이(學而)편을 장식한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배우고 이를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많은 이들은 공자가 면학, 즉 학문의 기쁨을 이야기 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는 ‘나는 친구가 없다’는 말로 들린다. 친구와 벗하여 한잔 술을 기울이면서 서로 흉금을 터놓고 즐기고 싶은데, 친구가 없으니 어쩌랴. 책을 벗하는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뜻으로 읽힌다.
바로 다음 줄에 본심이 드러난다.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친구가 멀리서 찾아오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렇다. 앉으나서나 배움을 이야기하던 공자가 느닷없이 ‘친구’를 이야기하는데, 다음 줄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愠 不亦君子乎)’이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면 군자답지 아니한가. 두 줄을 연결해서 보면, 친구가 찾아오면 기쁜데 나는 친구가 없다. 나도 알고 보면 친구가 그립고, 족히 더불어 친구할 만하다고 스스로 자부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라 준다. 그저 어렵게만 생각한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외로운 군자’로 자처하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의 비선 실세 의혹에 휘말린 정윤회 씨가 지난해 12월10일 오전 9시 50분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고소인 자격으로 출석하고 있다./서울중앙지검=최진석 기자 |
바로 이 대목, 군자를 말하는 공자에게서 사무치는 외로움과 진한 슬픔이 느껴진다. 높이 솟은 에베레스트가 한편으론 처연하게 보이는 것도 홀로 우뚝하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의 정신사에 우뚝 선 붓다와 예수도 친구가 그리웠을 것이다. 서로 어깨동무하고 부대끼며, 배반낭자(杯盤狼藉)하도록 취해보고, 스스럼없이 흉도 보고 싶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피라미드형 정권의 꼭지점 박근혜 대통령도 외로울 것이다. 친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공자가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박 대통령도 밤새 서류를 읽고 장관들에게 깨알지시를 하는지도 모른다. 친구가 없는 공자가 ‘군자’라며 자위한다면, 박 대통령은 ‘지도자’로 자처하는지도 모른다.
붓다가 말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결국 자신을 대체할 다른 자신은 없다는 뜻일 게다. 결국 모든 판단과 결정의 주체는 자기자신이다. 독일의 헤르만 헤세도 ‘안개 속에서(Im Nebel)’를 통해 말한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라고. ‘삶은 본디 외로운 것이고, 아무도 다른 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친구는 우정이, 연인의 애정이 고프다. 항상 다가가지만, 항상 저만치 있다.
이처럼 인간은 본디 외롭기 때문에 관계를 추구할 것이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정의할 때, 이 ‘사회적’이란 용어에서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인간, 언제나 혼자인 인간을 본다. 네트워크 시대에 모두가 허브(Hub)이자 동시에 터미널(Terminal)이다. ‘산아, 내게로 오라’는 주문은 ‘네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며 산을 향해 한걸음 내디디면서 ‘이산(離山)의 기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공자는 ‘친구가 찾아오면 기쁘다’고 했지만, 스스로 친구를 찾아갔다는 얘기는 없다. 예수 말씀대로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해야 하는 법. 친구가 그립다면 먼저 찾아가야 한다. 정(情)은 쌓일수록, 친구(親舊)는 말 그대로 오래 묵을수록 끈끈한 법이다. 오늘 박근혜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을 했다. 내가 기자단의 일원이라면 묻고 싶다. 혹시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할 친구가 있느냐고. 비선이나 문고리 권력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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