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기획] 건배사, 세상사(事)를 담다
입력: 2014.12.19 11:49 / 수정: 2014.12.19 15:56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건배사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 시대가 바뀌며 건배사는 줄임말과 삼행시 등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위하여~는 가장 많이 쓰이는 건배사다./남윤호 기자
서로의 잔에 술을 채우고 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건배사는 시대상을 담고 있다. 시대가 바뀌며 건배사는 줄임말과 삼행시 등으로 변했지만, 여전히 '위하여~'는 가장 많이 쓰이는 건배사다./남윤호 기자

[더팩트ㅣ이철영 기자] 유난스런 한해가 지나가고 있다. 20대부터 중장년층까지 술잔을 기울이며 “올 한해도 고생 많았다”며 서로를 위로하며 어깨를 다독인다. 올해보다 더 나은 내년을 위해 서로를 격려한다.

채워진 술잔과 건배사에는 시대가 담겨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더팩트>는 시대별 건배사와 연말 술자리 분위기 등을 들여다봤다.

◆ 건배사는 역시 ‘위하여~’

술자리에서 잔을 부딪치며 외치는 건배는 ‘마를 건(乾)’ ‘잔 배(盃)’ 자를 써 ‘잔이 마르다’는 뜻이다. 술자리에서 술잔을 비우자는 의미로 부딪친다고 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건배사는 술자리에서 빠지지 않는 양념이 됐다. 시대별 건배사도 매우 다양하다.

196~70년대 경제 개발 시절에는 ‘위하여’나 ‘함께! (가자!)’ 등을 외쳤다. 당시의 건배 문화는 대표나 임원 등이 건배사를 제의하고 함께 외쳤다.

시대가 흐르며 건배사는 ‘줄임말’과 ‘삼행시’ 형태로 변했다. 건배사 문화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X세대’와 ‘Y세대’가 등장한 1990년대부터다. 사랑과 우정을 나누자는 뜻을 담은 ‘사우나’ , 지금부터 화합하자는 ‘지화자’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추세를 이어받은 인기 건배사는 ‘오바마’다. 오바마는 ‘오래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오! 바라만 보아도 좋은 마이 프렌드’ 등으로 쓰였다. 하지만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봐'란 뜻으로 잘못 사용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진달래’라는 건배사도 있다. 본래는 ‘진하고 달콤한 미래를 위하여'로 쓰였지만, '진짜 달라면 줄래'라는 부적절한 뜻으로 변질하면서 부적절한 건배사 중 하나가 됐다.

인기 걸그룹의 이름을 딴 ‘소녀시대(소중한 여러분 시방 (잔) 대보자)’와 ‘원더걸스(원하는 만큼만, 더도 말고, 걸맞게, 스스로 마시자)’ 등이 있다.

건배사에 직업이 담기는 경우도 있다. 증권가 직장인들은 ‘상한가(상심 말고, 한탄 말고, 가슴 펴자)’, 정부 고위 공무원 사이에서는 ‘남행열차(남다른 행동과 열정으로 차기 정권에서 살아남자)’라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 연말 술자리, 위할 게 없다…

지난 15일 마포구 합정동의 한 술집에서 만난 20대 청춘과 30대 직장인 그리고 중장년층은 술자리 건배사에 대해 하나같이 위할 게 없다며 씁쓸해 했다./이철영 기자
지난 15일 마포구 합정동의 한 술집에서 만난 20대 청춘과 30대 직장인 그리고 중장년층은 술자리 건배사에 대해 하나같이 "위할 게 없다"며 씁쓸해 했다./이철영 기자

다양하기도 하다. 술자리 건배사를 고민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지난 15일 오후 마포구 합정동의 한 삼겹살집.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직장인들이 모여 있다. 술잔이 돈다. 다 같이 술잔을 든다. 어떤 건배사가 나올까. 술잔을 부딪칠 뿐 건배사가 없다. 술잔을 내리고 이내 다시 채운다. 차분한 대화만이 오갈 뿐이다.

연말 술자리가 맞나 싶을 정도다. 흔한 건배사 ‘위하여’도 없다.

건배사도 흥도 없는 술자리에 있던 한모(33·남) 씨는 “올해는 너무나 큰 사고가 잦지 않았냐. 경기도 좋지 않아서 늘 위기라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 딱히 즐거웠던 기억이 없다”면서 “우리 같은 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책도 딱히 없는 것 같고…. 내년엔 정말 좀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기는 침체하고 물가는 고공행진 중이다. 공공요금과 공산품, 음식재료도 연일 오르고 있다.

20대 청춘들도 위할 게 없기는 매한가지다. 남보다 나은 스펙을 쌓아 취업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내달리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20대 대학생 김모(여·23) 씨는 “친구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건배사를 하지 않는다. 위할 게 없지 않느냐”며 “술자리에서의 대화는 취업과 학점이야기가 전부다. 위할 것도 위하고 싶은 일도 없다”며 허탈하게 웃었다.

이제 막 취업한 사회초년생도 다르지 않았다. 사회초년생 김모(여·25) 씨에게 술자리 건배사와 이야깃거리를 물었다.

그녀는 “여전히 취업하지 못한 친구들이 많다. 그렇다 보니 술자리에서 따로 건배사를 하지 않는다. 건배사는 직장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정도에 불과하다. 먼저 취업한 탓에 술자리에서 안부를 묻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설명했다.

40대, 50대, 60~70대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명퇴를 당하지 않았지만 늘 외줄에 서 있는 느낌이라며 술잔을 기울인다.

50대 직장인 한모 씨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좀 더 일을 해야 하는데…. 이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나. 하루하루 눈치를 보며 생활하고 있다”면서 “올해는 다행히 직장에서 살아남았다. 내년 연말에도 직장에 남아 이렇게라도 술잔을 기울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최근 한 주류회사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추천받은 송년회 건배사를 공개했다.

추천 건배사로는 ‘새양말(새해가 밝아 양(2015년 청양)이 오고, 말이 갑니다)’ ‘진달래(진하고 달콤한 내일을 위해)’ ‘소화재(소통하고 화합하고 재미있게 마시자)’ ‘술잔은 비우고, 사랑은 채우고’ ‘우아미(우아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위하여)’ ‘사이다(사랑하자 이 세상 다 바쳐)’ 등이다.

cuba2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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