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대 경비원, 관리소장 갑질에 호소문 남기며 목숨 끊어
관리소장에게 책임 묻던 경비대장도 해고
경비원 3개월 재계약 족쇄…"이젠 누구 하나 나서려 하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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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4일 갑질 피해를 호소하며 투신 사망한 박 모 경비원의 죽음에 책임을 묻다 같은 달 31일 해고된 이길재 경비대장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A아파트 앞에서 관리소장 해임을 촉구하며 집회를 하고 있다. /이새롬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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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소장 퇴진과 해고 경비대장 복직 등을 요구하며 현수막을 걸었다가 강제 인사명령을 받은 홍성준 경비원이 24일 오후 서울 대치동 A아파트에서 지하실 휴게공간을 둘러보고 있다. |
[더팩트ㅣ이새롬 기자] 서울 강남구 대치동 A 아파트에서 일하던 70대 경비노동자가 관리소장의 갑질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70여 일이 지났다. 하지만, 여전히 이 아파트 경비원들은 관리소장을 상대로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월 14일 오전 서울 강남구 대치동 A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일한 70대 경비원 박 모 씨가 '관리소장의 갑질로 힘들다'는 취지의 호소문을 휴대전화로 동료들에게 전송한 뒤 해당 아파트에서 투신 사망했다.
고인은 지난 3월 8일 갑자기 경비반장에서 일반 경비원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신입 경비원의 실수와 화재경보기 오작동 등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였다.
박 씨가 사망하기 6일 전 아파트 단지를 청소하던 70대 김 모 씨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발견됐는데, 숨지기 전날 아파트 청소 용역업체에서 해고 통보를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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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A아파트 단지 곳곳에는 관리소장의 갑질을 규탄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
동료의 죽음에 관리소장의 책임을 묻던 이길재 경비대장도 3월 말 해고됐다. 이후 해당 아파트 경비원들은 해고된 경비대장 이 씨의 원직 복직과 관리소장의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여 왔다.
<더팩트>는 지난 24일과 25일 해당 아파트를 다시 찾았다. 이 경비대장을 비롯한 경비원들은 박 씨가 사망한 지 2달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일 휴게시간(오후 12시부터 1시 반)을 이용해 집회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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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31일부로 해고된 이길재 경비대장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대치동 A아파트 앞에서 관리소장의 해임을 촉구하며 주민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
이길재 경비대장은 매일 출근 투쟁하는 이유에 대해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제일 힘없고 백 없는 경비원이 죽었다. 이 책임을 누구 하나 지려고 한 사람이 없다"면서 "제 복직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책임감 때문이다. 내 동료가 죽었는데, 경비대장인 내가 나 몰라라 하면 마음이 편하겠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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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비대장과 집회원들이 아파트 단지 내에 관리소장 해임과 복직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걸고 있다. |
그사이 또 다른 경비노동자도 부당한 인사이동을 당했다고 밝혔다.
A 아파트에서 5년간 근무한 홍성준 경비원은 휴게시간에 아파트 단지 내에 해고된 경비대장의 복직 요구와 경비원들이 소속돼 있는 B 회사를 규탄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었다가 강제 인사명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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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아파트 홍성준 경비원이 지난 3월 투신 사망한 박 경비원이 동료들에게 보낸 호소문을 공개하고 있다. |
홍 경비원은 관리소장이 부임해 오자마자 갑질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퇴근 시간이 30분(기존 퇴근 시간은 익일 오전 6시) 늘어났고, 퇴근 전 근무자와 교대자가 나란히 앉아 인증사진까지 찍게 했다. 흰 머리의 근무자들에게 염색을 지시하고, 아파트 정문에서 끝동 12동까지 경비원들을 일렬로 도열해 몇 시간씩 주차관리도 시켰다.
1년마다 재계약하던 기존 계약방식도 3개월 단위로 바뀌었다. 그중에서도 부당한 인사권 남용이 가장 큰 문제라고 홍 씨는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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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 홍 씨는 지난 9일 소속 업체로부터 인사명령을 통보 받았다. B 회사는 홍 씨가 "경비원으로 위법하고 적법하지 않은 일이 단지에서 발생할 경우 제지를 하는 등의 대처를 해야 하는 당연 근무자임에도 불구하고 적절치 않은 현수막을 다는 것에 적극 동조하여 돕는 등 불미스러운 일을 자행했고, 시말서 작성도 거부했다"며 이같이 통보했다. |
익명을 요청한 한 경비원은 "지금도 (관리소장의) 압박이 계속되고 있다"며 "우리가 쉬는 시간에 시위에 참여하면 (소장 측 사람이) 카메라로 찍는다"고 귀띔했다.
그는 3개월 재계약이라는 족쇄 때문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는다면서도 "박 씨가 여기 78명 경비원을 대신해 십자가를 진 셈인데, 십자가를 지나마나 해결이 안 되니 참 힘들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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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홍 경비원은 5년간 몸담았던 8동 초소에서 1동 가장 끝 초소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을 아파트 전체에서 ‘가장 오지’라고 표현했다. |
또 다른 경비원 역시 고용불안을 호소하며 "업체와 관리소장이 바뀌고 1월에서 3월 31일까지, 다시 6월 30일까지 재계약했다. 그래도 노동부(고용노동부)에 안 걸린다더라"라고 말했다.
홍 경비원은 "(박 씨가) 오죽하면 뛰어내렸겠나. 그 순간의 모멸감 때문"이라며 "그동안 관리소장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유가족들이 고소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70여 일 만에 산재 고소·고발을 위해 유가족이 나타났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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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 씨가 밥을 지어 먹고 휴식을 취한다고 공개한 지하실은 각종 배관이 노출된 낡은 콘크리트 공간에 수도시설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
집회가 길어진 만큼 주민들의 관심도 줄어드는 모양새다. 아파트 단지를 돌며 10여 명의 주민을 만나 물었으나 "모른다. 관심이 없다"라거나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그나마 입장을 밝힌 한 주민은 "마음이 안 좋다"면서도 "경비원이 사망하신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아이들이 등교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셨어야 했나 싶은 섭섭함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망 사건으로 (관리소장이) 도의적으로 물러나시고 정리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그냥 버티는 사람이 승자인지, 어쨌든 빨리 해결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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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고 음습한 공간은 당장 쥐나 해충이 나온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
아파트 관리사무소 측은 C소장의 출근 여부와 인터뷰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근무는 잘 나오고 있다"면서도 "오늘은 안된다. 기자들과 만날 일은 없다"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아파트 관리소장 C씨 등 4명은 해고된 경비대장 이길재 씨와 박현수 민주일반노조 조직부장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접근금지 및 업무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씨와 노조가 관리사무소와 관할 아파트 관리 책임지역 및 아파트 입주민들의 사생활에 영향을 주는 지역에서 불법집회와 시위를 해 관리소장과 다른 관리 직원들의 명예를 훼손하고 업무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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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파트의 한 경비원이 지하실 휴게공간에서 식사를 마친 뒤 정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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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비원은 "천장에서 석면이 떨어진다"며 비닐과 청테이프로 어설프게 막아 놓은 천장을 가리켰다. |
한편, 지난 2020년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 최희석 씨가 입주민의 폭행과 괴롭힘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일명 '경비원 갑질 방지법' 인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이 만들어졌다.
현행 공동주택관리법에는 300가구 이상 공동주택에서 입주자와 관리주체가 경비원을 상대로 업무 외의 부당한 지시 등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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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실 한켠에는 그가 착용하던 마스크가 놓여 있다. 그는 "같이 근무하는 경비원 한 사람이 석면 노출로 신장 투석을 받고 있다"며 여기서 식사를 해야하는 10여분을 제외하고는 24시간 마스크를 착용한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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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준 경비원이 약 800명의 주민동의서와 관리소장 해임을 촉구하는 호소문 등이 담긴 진정서를 공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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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내에 '경비원도 사람이다. 인간답게 살고싶다'는 문구의 현수막이 걸려있다. |
취재진이 이틀간 만난 경비원들은 하나같이 "빨리 일이 해결돼 기쁜 마음으로 일하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경비원들은 갑질에 신음하고 있다.
최근 지속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 사각지대에 있는 아파트 입주민 등에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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