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은화의 낭중지추] 법관 45년 양승태의 불편한 깨달음
입력: 2019.06.03 14:16 / 수정: 2019.06.03 14:16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이제 와 검찰조서 신빙성 운운…형사사법체계 존중해야

[더팩트ㅣ송은화 기자] "검찰 신문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받아보니 검사 조서를 정말 우리(판사)가 조심해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묘한 질문을 통해 답변과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기재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1차 공판. 그는 자신을 피고인이 아닌 법관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냈다.

재판부에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려는 전략일 수도 있겠고, 무의식적인 발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겠다. 어쨌든 피고라는 본인의 현 위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특히 본인의 혐의 없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동안 당신에게 재판을 받았을 수 많은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

"저는 이번 수사가 정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법관들이 검찰에서 조사를 당하면서 검찰 조서를 얼마나 경계해야 되고, 신빙성이 적은 것인지 직접 체감할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1975년부터 45년째 법관 생활을 한, 그것도 사법부 최고 수장인 대법원장을 지낸 그가 이제야 검찰 조서의 신빙성 문제를 운운한 것은 실망스럽고, 아쉬운 대목이다. 과거 양 전 대법원장의 심리로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사람이 있다면, 특히 실제로 검찰의 유도신문으로 불리한 입장에서 공판이 진행돼 억울함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발언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어떤 일이든 직접 해보거나, 당해보지 않으면 그 정도를 알기란 어렵다. 청년들에게 직접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재판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며, 해당 발언은 전 대법원장으로서 하기엔 부적절해 보인다. 본인이 그동안 검찰 조서를 읽으며 재판을 심리했는데, 직접 조사를 받아보니 아니었다라니.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사법농단 의혹의 최고 책임자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9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1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이 외에도 양 전 대법원장은 작심한 듯 현 상황을 다양하게 비유하며 검찰을 비난했다.

검찰이 위법한 공소장을 작성해 놓은 상황에서 심리를 하자는 것은, 피고인과 변호인들에게 "축구장의 그물, 골대 없이 축구 경기를 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밝혔다. 또 이 사건을 소비자를 현혹시키는 포장지에 빗대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도 보잘것 없는 내용으로 포장만 그럴싸하게 내놓은 상품들이 있다며.

프랑스 역사가 앙드레 모루아가 쓴 '영국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증오하는 권력에 대해 공포심 때문에 복종하는 것만큼 비참한 나라는 없다"

그러면서 "대한민국이 법의 지배가 이뤄지고 법이 모든 사람을 보호해야 그 아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민주주의가 보장될 것인지, 아니면 무소불위로 휘두르는 검찰의 칼날에 숨을 죽이고, 혹시 그 칼날이 자기한테 향해 있는지를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하는 '검찰 공화국'이 될 것인가. 최근 이뤄지는 몇 건의 재판이 바로 이런 앞날을 결정하게 되리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대법원 전경/ 사진=대법원 제공
대법원 전경/ 사진=대법원 제공

보통 재판을 참관하면 재판장이 선고를 앞두고 해당 사건에 빗댈수 있는 인물들의 말 등으로 선고 이유를 대신할 때가 있다.

그 중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판사의 말을 끝으로 칼럼을 갈음하려 한다.

2016년 4월 12일. 당시 서울중앙지법 형사 9단독 강성훈 판사는 한국 불교 2대 종단인 태고종 내분 사태와 관련해 폭력을 주도한 혐의로 재판을 받는 스님 13명 모두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같이 밝혔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 해서 바다는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여서 거대한 대양을 이룬다는데, 피고인들이 보인 수 년간의 갈등과 재판에 임한 태도를 볼 때 과연 넓은 바다를 지향하는가, 넓지 않은 호수에서 싸우다가 자기만의 옹달샘을 만든 것이 아닌가."

'해불양수’는 피고인들 중 한 스님이 재판 중 한 말로, 강 판사가 그 의미를 곱씹어보고 선고날 인용한 것.

"법원에 자주 오는 초등학생들이 법정에서 재판장에게 '왜 스님들이 재판 받아요?'라고 물으면 말문이 막혔을 것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등학생들도 다 안다.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다 큰 어른들의 행태라고 보기에도 너무 부끄럽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깨닫길 바란다. 표현 중에 다소 과한 게 있었다면 해량(海諒/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달라."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은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 아직 혐의가 확정되지 않았고, 29일에야 첫 공판이 시작된 만큼 앞으로 다퉈볼 쟁점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40년을 넘게 법관으로 살았고, 사법부 수장을 지낸만큼 최소한의 형사사법 체계와 절차를 존중하는 선에서 스스로를 방어하길 기대한다.

이 재판을 방청하는 초등학생들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재판 받아요?"라고 물으면 "검찰 때문"이라고 답할 순 없지 않은가.

송은화 happy@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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