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성의 B급칼럼] 제2의 조영래를 기다리며
입력: 2019.06.03 14:16 / 수정: 2019.06.03 14:16
고 조영래 변호사(1947~1990)/더 팩트 DB
고 조영래 변호사(1947~1990)/더 팩트 DB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재심 무죄에 부쳐

[더팩트 | 장우성 기자] 방탄소년단 멤버 수보다 적은 청년 다섯명이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황당무계한 조작 사건이 있었다.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1971)이다. 당시 검찰은 서울대 졸업·제적생인 김근태, 이신범, 장기표, 심재권, 조영래가 학생시위와 화염병 100개를 준비해 박정희를 타도한 뒤 김대중을 혁명위원장으로 추대해 권력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반인간적인 고문에 청년들의 영혼과 육체는 파괴됐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을 화염병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기상천외한 논리에도 판사봉은 주저없이 휘둘려졌다. 4.27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정희는 이 사건으로 눈엣가시인 학생운동을 초토화하고 이듬해 10월 유신을 강행해 영구집권의 길로 들어섰다.

반세기가 지난 2019년 5월 30일 법원은 이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 받았던 고 조영래 변호사(1947~1990)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유족의 재심 청구에 따른 결과였다. 조영래 변호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하기란 생전 유명했던 그의 필력으로도 쉽지않을 듯 하다. 한 두 문장으로 표현하기에는 그가 남긴 족적과 요절한 아쉬움이 너무 크다.

서울 서초동 변호사회관 앞에는 조영래 변호사의 흉상이 지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밑에는 이렇게 써있다.

'엄혹한 독재의 시대에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하였고,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는 변호사로서 억압받는 이들의 인권을 수호하고 공익소송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가 보여준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일을 성사시키는 탁월함은 오늘날 변호사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사실 조 변호사의 가치를 온전히 나타내기에는 너무 아쉬운 글이다. '조변'은 모든 사람이 아까워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 나을지도 모른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은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직도 "'조변'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묻는다고 한다. 1990년 12월12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책을 한 권 펴냈다. 조시를 김지하 시인이 썼고 추도 글을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기자가 실었다. 보수를 대표하는 논객까지 나설 정도로 그를 기리는데는 이념도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시장은 조영래 변호사의 사법연수원 12기 동기다. 사진은 2015년 12월11일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시장은 조영래 변호사의 사법연수원 12기 동기다. 사진은 2015년 12월11일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기념행사에 참석한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재인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뉴시스

현직 대통령과 차기 대선 후보에게도 존경받는 사람이다. 그는 사법연수원 12기인데 동기생이 아주 화려하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눈에 띈다. 문 대통령은 사법연수원을 2등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원하던 판사로 임용되지 못 했다. 연수원 동기지만 나이는 형뻘이던 조 변호사는 문 대통령을 김앤장 등 몇몇 법무법인에 소개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한국 환경운동이 태동한 계기로 꼽히는 '울산 온산병' 사건(1984)에도 함께 변론에 나섰다. 1980년대는 서울에 조영래가 있다면 부산에는 문재인이 있던 시대였다. 2015년 조 변호사 25주기 때 야당 대표이던 문 대통령은 자신을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어준 조 변호사를 뒤따라 약자의 편에 서겠다며 "영래 형, 지켜봐주세요"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박원순 시장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주저없이 조영래 변호사를 꼽는다. 자신을 인권변호사의 길에 들어서게 한 것도, 불모지였던 시민운동을 개척하게 한 것도 그였다. 애초 저작권법에 몰두했던 변호사였던 박 시장은 조 변호사와 유명한 '망원동 수재 사건'(1984)에 참여하면서 인권변론에 발을 들였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전신 격인 '정법회' 창립도 함께 추진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1986)을 비롯해 1980년대 시국사건의 변호인석에 바늘과 실이었다. 시민운동 투신의 계기가 된 유학을 떠난 것도 그렇다. 서울대병원 병실에 병문안 온 '박변'에게 암투병 중이던 '조변'은 "이제 돈 그만 벌고 넓은 세상을 살펴보게"라고 말했다. 2년간 영국과 미국에서 공부하며 시민운동에 눈을 뜬 박원순 시장은 귀국해 참여연대를 만들었다. 박 시장은 "조 변호사가 살아있었다면 그가 서울시장을 하고 나는 비서실장을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년이면 조 변호사가 세상을 떠난 지 30주기가 된다. 과연 그가 꿈꾸던 세상은 이루어졌을까. 아직도 5.18 망언이 떠돌고 그가 싸웠던 독재시대에는 조용했던 이들이 '좌파독재를 타도하자'고 고함을 지른다. 고 김용균,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등 '제2의 전태일'이 줄을 잇는다. 민주주의의 보루인 사법정의는 땅에 떨어져 심판대에 섰다. 아직 새벽은 길고 우리에게는 더 많은 조영래가 필요하다.

leslie@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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