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프리즘] 나달의 불안, 오스타펜코의 확신
입력: 2017.06.14 10:54 / 수정: 2017.06.14 15:32
옐레나 오스타펜코. /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옐레나 오스타펜코. /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더팩트 | 최정식 선임기자] 스포츠의 속성을 설명할 때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비롯된 두 개념을 사용하곤 한다. 아곤(agon)과 아레테(arete)다. 아곤은 상대와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며, 아레테는 자신의 분야에서 완벽에 가까운 최고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스포츠에는 아곤과 아레테가 어우러져 있다. 경쟁에서는 승리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 탁월성에서는 더 완벽해지려는 강력한 동기가 있어야 한다.

12일(한국시간) 막을 내린 2017 프랑스오픈의 남녀단식 우승자는 여러 면에서 대조적이다. 남자단식에서 정상에 오른 라파엘 나달(31, 스페인)은 클레이코트의 최강자. 통산 10번째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여자단식 패권을 차지한 옐레나 오스타펜코(20, 라트비아)는 그랜드슬램대회는 물론 투어대회 우승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클레이코트에 맞지 않는 선수였다.

테니스가 프로화한 오픈 시대 이후 시드를 받지 못한 선수로는 첫 우승, 역대 여자단식 우승자 최저 랭킹(47위) 등도 물론 놀랍다. 그러나 더욱 경이로운 것은 '상식'을 깼다는 점이다. 클레이코트는 하드코트나 잔디코트에 비해 볼의 바운드가 높고 스피드는 느리다. 상대가 받아넘길 수 없는 강력한 샷을 만들어내기 힘들다. 그래서 끈질긴 스트로크와 강력한 수비를 갖춘 베이스라이너들이 클레이코트를 선호하며 톱스핀 스트로크가 필수적이다. 완급 조절 없이 공격만 하다가는 제풀에 지치거나 범실을 쏟아내며 무너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오스타펜코는 스핀보다 플랫 강타, 긴 랠리 대신 속공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 '클레이의 정석'을 뒤집는 플레이로 일관한 것이다. 3번 시드로 수비가 가장 뛰어난 선수 가운데 하나인 시모나 할레프(루마니아)를 상대로 한 결승에서 오스타펜코는 54개의 위너를 기록한 반면 범실도 54개를 저질렀다. 공격 일변도의 과감한 플레이를 펼친 결과다. 1회전부터 7경기의 위너가 299개로 가장 많았다. 2위와 차이가 100개 이상이 날 정도. 이번 대회 총 범실이 271개로 2위 선수보다 90개 많았다. 범실이 많이 나오더라도 그보다 더 많은 공격 성공으로 이기겠다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테니스에서 이기려면 수비가 아니라 공격을 해야 하며, 프랑스오픈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지난해 4대 그랜드슬램대회에서 모두 1회전에서 탈락했던 오스타펜코는 그에게는 최악의 코트에서 우승했다. 엄청난 파워와 두려움 없는 공격성향으로 잔디코트에서 주니어부 챔피언에 올랐던 그는 "내가 정말 컨디션이 좋고, 공을 정말 제대로 친다면 어떤 것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경기에서 진다면 자신의 테니스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이지, 상대의 실력이 뛰어나거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코트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라파엘 나달. /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라파엘 나달. / 게티이미지코리아 제공

오스타펜코와는 달리 나달의 우승은 모두들 예상했던 터였다. 그러나 결코 만만치 않은 상대인 스탄 바브링카(스위스)를 상대로 그토록 완벽한 테니스를 구사하며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리라고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다. 원래부터 클레이코트에 강했지만 이제는 완숙의 경지에 들어선 모습을 보였다. 끊임없는 부상에 시달렸고, 최근 몇 년간 부진에 빠지기도 했던 그는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나달은 전성기의 실력을 되찾아 10번째 프랑스오픈 타이틀을 차지할 수 있었던데 대해 '불안'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날마다 불안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노력하기 때문에 잘 된 일이다. 지금도 불안하고 최근 3년간 그랬다. 아마 며칠 있으면 또 불안해질 것이다. 불안감이 없다면 오만한 것이다. 나는 오만한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 그에 따른 불안이 그를 좀 더 높은 경지로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다.

오스타펜코의 확신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힘인 것처럼 나달의 불안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 있는 강력한 동기다.
malishi@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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