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투하 불법성 검증 국제토론회 히로시마서 열려
일본서 사라진 피폭 조선인, 미국은 무시·한국은 외면
일본 히로시마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에 대해 법정에서 책임을 묻기 위한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사진은 국제토론회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인 '리틀보이'가 투하됐다. 미국은 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리틀보이'로 인해 45만 명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후 미국은 일본을 피해국으로 감싸안으면서 가해국의 오명을 숨겨 주었다. 그런 역사 속에서 지워진 약 10만 명의 조선인 피해자들이 있다. 79년의 세월 속에 잊힌 그들의 명예는 회복할 수 있을까? <더팩트>가 6월 7~8일 일본 히로시마 열린 '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 현장을 찾아갔다. [편집자주]
[더팩트 l 일본 히로시마=나윤상 기자] 오랜만에 여권을 꺼냈다. 일본 히로시마에서 6일부터 9일까지 열리는 '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국제토론회는 2026년 미국 뉴욕에서 열릴 원폭국제민중법정에서 1945년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을 터뜨린 미국의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한 위법성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다.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 중 하나인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태평양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승리의 세리머니로 여겨왔음을 상기했을 때 제2차 세계대전 승자로 연합국의 주된 멤버인 미국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겠다는 담대한(?) 계획에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원폭민중법정 실행위원회에 깊이 참여하고 있는 국내 단체는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이다. 이 단체는 한반도에서의 전쟁 반대와 비핵화를 주도하는 단체로 이번 국제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해 전국에서 회원 100명이 히로시마로 향했다. <더팩트> 취재진도 이들과 함께 히로시마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45년 히로시마 원폭이 폭발하고 뜨거운 열로 인해 시민들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오타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오타 강은 시신으로 가득 찼다. 사진은 오타 강 위를 다니고 있는 유람선.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ICJ 모호한 판결…하지만 핵무기는 분명한 불법
히로시마에 도착한 다음 날인 지난 6월 7일. 평통사 회원들은 총 3개 조로 나뉘어 원폭이 떨어진 현장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자료관 등에 대한 해설을 들었다. 취재진은 광주⋅전남⋅부산에서 온 평통사 회원 23명과 함께 동행했다.
히로시마는 일본 혼슈 서남부에 위치한 현(우리나라 도에 해당)으로 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지칭하며 편입시킨 시마네현과 맞닿아 있다.
1945년 8월 6일 새벽 미국 육군항공대 소속 B-29 폭격기 '에놀라 게이(Enola Gay)'가 히로시마 오타강과 모토야스강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아이오이교(上生橋)에 원자폭탄 리틀보이를 떨어뜨린다. 아이오이교가 목표가 된 것은 하늘 위에서 T자 형태로 눈에 잘 띄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79년이 지난 오타강과 아이오이교는 매우 평화로워 보였다. 폭탄이 떨어지고 뜨거운 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뛰어들어 시신들로 강을 메워졌다는 오타강에는 한가로이 유람선이 지나가고 있었다.
히로시마 원폭 돔은 일본이 피해국임을 알리는 상징물로 존재한다. 미국과 일본은 원폭이 떨어진 지점으로 히로시마산업장려관을 홍보하고 있다. 사진은 히로시마 원폭 돔을 설명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는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아이오이교 모토야스 강변 쪽으로는 유명한 '히로시마 돔'이 앙상한 지붕을 드러내고 서 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 상징물을 '그라운드 제로'(원폭이 떨어진 지점)로 알고 있다. 일본에서도 그렇게 홍보하고 있다. 돔 앞 표시물에는 '1945년 8월 6일 역사상 최초인 원자폭탄에 의해 붕괴된 구 히로시마산업장려관의 잔해이다. 폭탄은 이 건물 위 약 600m 공중에서 폭발되어 1개의 원폭에 의해 20만 명에 이르는 생명을 앗아갔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점은 이 곳 돔이 아니라 그 곳에서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시마(島)내과였다.
해설을 맡은 부산 평통사 박석분 씨는 "1946년부터 미국과 일본 요시다 내각은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재건을 한다. 미국에 의해 일본은 가해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피해자의 모습이 부각된다. 평화의 상징물로 보이는 것이 필요했던 미국과 일본 친미 내각에 의해 그라운드 제로는 시마내과에서 원폭 돔이 되어 버렸다"고 설명했다.
이후 1996년에 원폭 돔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다. 원폭 돔이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해는 국제사법재판소(ICJ)가 유엔 총회에서 '핵무기 이용 위협 또는 핵무기 사용의 합법성 여부'에 대한 답변을 내놓은 해이기도 하다.
히로시마 원폭 돔에서 동쪽으로 300미터에 위치한 시마내과. 1945년 8월 6일 미국 B-29 에놀라게이에서 떨어진 리틀 보이는 시마내과 바로 위 600미터에서 폭발했다. 사진은 시마내과.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미국과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이 나오기 앞서 세계유산으로 등재해 버리는 무리수를 둔다. 당시 중국이 화가 나서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세계유산 등재를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시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은 매우 모호한데 결론부터 말하면 '원칙적으로 핵무기 사용은 위법하지만, 핵무기 사용을 완전히 금지하는 관습법은 존재하지 않으며 한 국가의 생존이 걸린 극한의 정당방위 상황에서 사용하는 것을 위법하다고 결정할 수 없다'였다.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결은 한계가 보이기는 하지만 명백히 핵무기의 불법성을 인정한 판결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미국은 일본이 피해국임을 강조하고 나섰을까?
박 씨는 "미국이 원폭의 위력을 실험한 뒤 일본이 가해국으로 조선이나 중국 및 동남아에 대한 전쟁범죄를 감춰주고 피해국임을 강조하면서 일본도 더 이상 미국이 행한 원폭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 말하지 않겠다고 서로 동맹적 결탁을 한 것이다"고 주장했다.
평화기념자료관에는 평일임에도 일본 각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학생들의 필수 견학 코스로 보였다. 사진은 7일 평화기념자료관을 찾은 학생들의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원자폭탄 피폭 조선인이 사라졌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는 평일인데도 일본 각지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평화기념공원 한 편에는 평화기념자료관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인 일본에 대해 원폭 피해국임이 강조되는 현장은 원폭 돔에서 멀지 않은 평화기념자료관에서 볼 수 있었다.
평화기념자료관은 원자폭탄으로 희생당한 당시의 현장에 대한 사진과 기록물로 인해 그날의 참상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자료관에는 빠진 것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8월 6일 당일 일본인과 같이 피해를 겪은 조선인들의 모습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모습이다.
심진태(80)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1세대 원폭 피해자다. 그는 1943년 1월 9일 히로시마 에바마치 251번지에서 태어났다.
1943년 1월 9일 히로시마 에바마치 251번지에서 태어난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은 민중법정의 주요 원고 중 한 명이다. 사진은 위령제에서 추도사를 읽고 있는 심 지부장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심 지부장은 "원자폭탄은 바람이 50%, 방사선을 동반한 열이 50%인 아주 무서운 무기다. 1945년 8월 6일 그날 히로시마 인구 45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사흘 후 나가사키에서 30만 명 총 75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이 10만 명이 있다"고 말했다.
심 지부장의 말과 달리 그날 이후 조선인 10만 명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사라졌고, 미국에서는 무시당했으며, 한국에서도 외면당했다.
심 지부장은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후 일본에서 피폭된 조선인에 대해서 한 번도 통계나 실태조사를 한 적이 없다"고 항변했다.
미국이 원폭의 원죄를 숨기기 위해 일본의 전쟁범죄를 묵인하며 전범국가에서 피해국으로 둔갑시킨 사이 조선인들의 피해는 완전히 무시됐다. 그렇다고 해방된 조국에서 원폭 피해자들을 반겨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원폭 피해자로서 동포로부터 괄시와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피폭 조선인들을 괴롭히는 더 큰 문제는 방사능 피폭에 따른 유전병이었다.
당시 살아남은 조선인 3만 명 중 대한민국으로 돌아온 인원은 2만 3000명이다. 이들의 아이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전병과 끝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는 당시 피해를 입은 사진과 증언들로 가득찼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도 조선인 사망자나 피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진은 평화기념자료관에 있는 당시 모습을 찍은 사진.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이제는 미국의 책임을 물어야 할 때
이제 조금 명확해졌다. 왜 이들이 원폭국제민중법정을 열어 1945년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의 책임을 묻고 싶은지.
평통사 관계자는 "한국인 피폭자 문제에 대한 미국과 일본의 사죄 없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된다. 2016년 오바마는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이 때에도 미국의 원폭 투하에 대해서는 사과하지 않았다. 또한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은 기시다와 함께 히로시마를 찾았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고 이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만 용인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히로시마는 평화가 아니라 일본과의 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구실로 변질되었다"고 강조했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구석 한 편에는 한국·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결성되고 1970년 한국에서 만들어져 히로시마로 오게 됐다. 한동안 평화기념공원 내에도 들어가지 못했다가 1999년에야 히로시마 시장의 지시로 지금의 자리에 놓이게 됐다. 그것도 오바마 방일 전까지 위령비 앞에는 철제 펜스가 쳐져 있는 구석진 자리였다.
취재 도중 한국 젊은이로 보이는 이가 생수와 소주 한 병을 위령비 앞에 놓는 것을 보았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한 켠에 세워진 한국·조선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사진은 위령비에 참배하고 있는 평통사 회원들.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서울에서 직장을 다닌다는 신용학(30) 씨는 우연히 히로시마 피폭자 중 조선인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위령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신 씨는 연휴 기간을 이용해 히로시마를 찾았다고 했다.
신 씨는 "당시 피폭당한 조선인들이 목이 마른 상태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빗물을 마시고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분들을 달래기 위해 깨끗한 생수 한 병과 소주 한 병을 놓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오후 6시부터 위령비 앞에서 피폭당한 조선인들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일본 언론에서도 큰 관심을 보였다. 교도통신, 히로시마 테레비 등 8개 정도의 언론이 취재를 했다.
이태재 한국 원폭 피해자 후손회 회장은 위령제에서 직접 대금으로 재일 조선인들이 가장 즐겨 불렀다는 '고향의 봄'을 불러 참여자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7일 위령비 앞에서 1945년 피폭당한 조선인들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열렸다. 한국 원폭 피해자 후손회 이태재 회장은 대금으로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사진은 이태재 회장이 고향의 봄을 연주하는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위령제에 참여한 평통사 한 청년위원은 추모사에서 "자국의 희생을 줄인다는 미명 하에 미국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전쟁 당사자들은 빠른 전쟁 종식의 명분으로 이어졌으며 냉전 체제로 굳어진 이후 불가역적인 상황으로 치부되었다"면서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 이념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조선인 피폭 문제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다. 저 또한 과거에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원폭이 그저 한반도 해방에 연결된 정당한 피해로만 알고 있었던 것에 용서를 구한다"고 말했다.
한국무용을 하는 김영자 씨는 이날 추모 춤을 추기 위해 해남에서 히로시마를 찾았다. 김 씨는 추모 춤 '넋을 위로하다'를 추기 위해 조선인 피폭에 대한 논문까지 읽었다고 했다. 그녀의 춤사위 하나하나가 피폭 조선인의 한을 위무하는 듯했다.
김 씨의 춤사위를 보면서 이곳을 방문한 일본인 학생들은 자국이 피해국으로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역사만을 바라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 지 궁금했다.
위령제에서 추모 춤 '넋을 위로하다'를 추고 있는 김영자 무용가.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미국을 민중법정에 세우기 위한 국제토론회
8일 오전 9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제2차 국제토론회가 열렸다. 평화기념관 지하 2층 코스모스 관은 200여 명이 넘는 관계자와 언론인들로 가득 찼다. 점심과 저녁은 주최 측에서 준비한 도시락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토론의 열기는 내내 활기찼다.
오전부터 옅은 구름이 낀 하늘은 오후 6시부터 가늘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오후 7시 이후에는 제법 굵은 비가 쏟아졌다. 국제토론회가 끝나고 평통사 회원 100여 명은 원폭 돔 앞 모토야스강 강가에서 평화의 배를 띄우기로 했는데 자칫 무산될 뻔했지만 비라도 맞으면서 해야겠다며 행사를 감행했다.
그들은 모토야스강 강가에서 ‘평화’, ‘통일’, ‘자주’ 등을 새긴 배를 띄우면서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우리의 소원’을 불렀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김영자 씨는 추모 춤 ‘빛으로 오소서’를 선보였다.
8일 제2차 국제토론회가 끝나고 참가자들이 모토야스강 강가에 평화의 배를 띄웠다.사진은 히로시마 원폭 돔 앞 모토야스강 강가에 띄운 배 모습. / 히로시마 = 나윤상 기자 |
김 씨는 추모 춤에 대해 "길게 펴진 하얀 천의 가운데를 자르며 가는 장면은 원폭 피해자 원혼들이 어둠을 찢고 빛 가운데로 모여 위로한다는 뜻을 지닌다"고 설명했다.
'원폭국제민중법정 제2차 국제토론회'는 이렇게 마무리됐다. 이들의 소원대로 국제민중법정이 개최되기까지 너무나 큰 벽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우선 미국의 원폭으로 인해 한반도가 해방됐다는 전설을 뛰어 넘어야 한다. 대부분 한국인들은 그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처참한 전쟁범죄가 가혹하리만큼 처벌이 안 된 부분에 화가 나 있다. 이 상태에서 미국을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비록 민중법정이라고는 하지만) 법정에 세운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3박 4일을 같이 동행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논의가 결코 아마추어적인 것이 아니며 철저히 법적, 역사적 논의가 충분히 이행되고 있음을 지켜봤다.
원폭국제민중법정 실행위원회는 2026년 뉴욕에서 열리는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에서 미국을 민중법정에 세우려 한다. 이 민중법정을 통해 10만 조선인 피폭자들의 역사적 실상을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꼭 성공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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