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만에 소식들은 유족 김귀남 씨 "할머니가 갸(삼촌)는 야무니까 꼭 살아올 것이라 했는데…"
지난 8일 조선인 일제 강제동원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씨(사진 맨 왼쪽)로부터 남양군도 밀리환초 조선인 학살사건 내막을 듣고 있는 유족 김귀남(사진 맨 오른쪽) 씨./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
[더팩트 ㅣ 광주=박호재 기자] 태평양 전쟁 말기 남태평양 밀리환초 강제 동원 조선인 학살 사건에서 숨진 김기만(1923년생) 씨의 유족 김귀남(86. 담양읍) 씨는 지난 8일 삼촌의 사망 소식을 확인하고 허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10일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에 따르면 일본인 강제동원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67.竹内康人) 씨는 수소문 끝에 어렵게 연락이 닿은 유족 김 씨를 담양읍의 한 떡방아 가게에서 만나 위로의 말을 전했다.
다케우치 야스토 씨가 공개한 '구 해군 군속 신신상조사표를 보면, '金山基萬'으로 창씨개명한 김 씨의 삼촌 김기만 씨가 1942년 3월 고향을 떠난 지 꼭 3년 만에 스물두 살 짧은 삶을 비참하게 끝냈다. 자사(自死)라고 기록돼 있는 걸 보면, 조선인 봉기 진압에 나선 일본군과의 격전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추정된다. 증언에 따르면 1942년 3월경 전남도에서 800여 명이 남태평양 마셜제도 동남쪽 끝에 위치한 밀리환초에 일본 해군 군속으로 강제 동원돼 비행장 활주로 공사 등 일본 군 시설 공사에 투입되어 혹사당했다.
미군이 1944년부터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해상 봉쇄에 나서면서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은 극한의 상황에 몰렸다. 식량 등 보급 사정이 차단되자 일본군은 일본군에 묶어 인원을 몇 몇 섬에 분산시켜 자력갱생하도록 했다.
그 과정에서 어느 날 동료 한 명이 감쪽같이 사라지자 조선인들은 동료를 찾기 위해 섬 곳곳을 찾아 나서다 어느 무인도에서 허벅지 살점이 포를 뜨듯이 도려져 나간 사체를 발견했다. 실종된 동료였다.
'고래고기'라며 보급된 식량이 사실은 동료의 인육이었다는 것을 안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잡혀 먹으나 굶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는 심정으로 일본군 11명을 제거하고 섬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군 7명을 살해했으나 나머지 4명이 도주해 인근 섬에 있는 일본군에 그 사실을 알리면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기관단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은 저항에 나선 조선인들을 '반란군'이라며 무차별 총살했고, 이 과정에서 전남 담양 출신 25명을 비롯해 55명(32명 총살, 23명 자결)이 목숨을 잃었다.
삼촌이 징용을 떠날 때 겨우 세 살이었던 김 씨는 구순을 바라보는 여든여섯에서야 일본인 강제동원 연구자 다케우치 야스토 씨를 통해 삼촌의 사망 내막을 접하게 됐다.
"그때 모집이랍시고 무조건 데려갔다고 해요. 그런데 간 사람만 있지 온 사람은 아예 없어. 온 사람이 있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라도 들었을텐데…."
다케우치 야스토 씨가 유족 김귀남 씨에세 밀리환초에서 숨진 김기만 씨 관련 기록을 보여주고 있다./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
돌아가신 할머니 말을 기억하는 김귀남 씨에 따르면 처음에는 소식이 두어 차례 왔다고 한다.
"징용에 끌려간 뒤 1년 다 돼서 편지가 두어 번 왔었나 봐요. 잘 있다고. 편지에 남양군도라고 해서 그런 줄 알지 시골 어른들이 어떻게 알겠어요. 그 뒤 소식이 뚝 끊어지고 말았죠."
당시 할머니는 소식은 없었지만 아들이 꼭 살아돌아 올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돌아가실 때까지 애타게 기다렸다고 한다.
김귀남 씨는 "삼촌이 떠나면서 곧 돌아올 것이라고 했나 봐요. 삼촌이 솔찬히 야물었던가봐요. 할머니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갸는(그 아들은) 꼭 살아 돌아올 것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고 회상했다.
김귀남 씨는 "해방돼도 기별이 없으니 할머니가 '거기 살기 좋으니까 결혼해서 거기서 산 모양'이라고 하셨죠. 삼촌이 보내왔던가 어디서 보내왔던가는 잘 모르겠는데 한번은 일본 돈이 왔었나봐요. 해방되고 아주 오래 전에 일본 돈을 한국 돈으로 바꿔주는 화폐 교환이 한번 있었는데, 할머니는 '아들 오면 그 돈 쓴다'고 교환도 하지 않고 돌아가실 때까지 그 돈 꽉 감추고 있었다"고 허탈한 심정을 밝혔다.
김 씨는 삼촌이 총각 때 끌려가다 보니 손도 없었을 뿐 아니라, 생사도 모르다보니 제사를 지낼 수도 없었고, 아직 사망 신고도 못했다고 했다.
김 씨는 "혹시라도 살아있는지도 모르는데 제사를 지낼 수도 없고 사망신고를 할 수도 없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아야 사망신고를 하던지, 뭐를 하던지 할텐데 조금 더 기다려 본다고 한 것이 지금까지 온 것이다"고 말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하면서 정부에서는 강제 동원 피해 신고를 접수했지만, 김 씨는 이때도 정부에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진 한 장 없고, 인우보증을 서 줄 사람조차 없다 보니 포기하고 말았다.
김 씨는 "남양군도 간 줄만 알았지, 그때 거기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셨는지는 몰랐다.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집안에서 나 혼자 밖에 없는데, 뒤늦게라도 소식을 알게 돼 다행이다" 며 소식을 알려 준 다케우치 야스토 씨에게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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