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당시 시민군으로 시신관리…“살아남은 사람들 조롱과 멸시받는 현실 괴로워”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으로 활동하며 시신관리를 맡았던 오기철 씨는 광주시민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에 대해 스스로 되묻는다고 밝혔다. 사진은 1980년 당시를 회상하고 있는 오기철 씨./광주=나윤상 기자 |
총칼 앞에서도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정수인 똘레랑스의 가치를 평생에 걸쳐 설파하며 살아왔던 인문주의자 고(故) 홍세화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더팩트>가 5월의 기억을 여전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 나섰다. 1980년 그날, 광주의 5월은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숭고한 이들이 피를 바친 희생의 제단 위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요?"
1980년 5월, 시민군으로서 광주 시민들의 시신처리를 맡았던 오기철(60) 씨에게는 아직도 이 질문이 현재진행형으로 남아 있다. 답을 찾으려고 하면 자꾸만 멀어지는 듯 보였다.
1964년생인 오 씨의 당시 나이는 16세(만 나이 15)였다. 국민(초등)학교 졸업 후 학교에 미련이 없었던 그는 돈을 벌고 싶었다. 친척 소개로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에서 일하기도 했고, 1980년에는 광주 남구 양림동에서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나전칠기 업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이가 어렸음에도 또래보다 조숙한 그는 1958년생 형들과도 거리낌없이 지냈다. 당시 그의 사진을 보면 누구나 16세라고 믿지 못할 정도로 보인다. 그는 "당시에도 장발에 양복을 입은 모습을 보고 사회생활을 하는 일반인처럼 보았다"고 전했다.
그에게 5⋅18에 대한 기억은 전날 같이 일하던 사람들과 담양 추월산으로 1박 2일 야유회를 갔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버스가 정상 코스를 가지 않았던 것과 버스 밖으로 보였던 금남로에 배치된 군인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의 일이었다.
당시 금남로에서 본 군인들의 인상이 평범하지는 않았지만 특이점이 없는 모습에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가 마주친 충격적인 장면은 그의 삶을 시민군에 들여놓는 계기가 되었다.
1980년 당시 오기철 씨 모습. /오기철 |
오 씨는 시민군으로 합류하게 된 과정에 대해 "죽은 시체가 실린 리어카를 끄는 사람들의 모습을 봤다. 그들은 확성기로 시민들을 향해 ‘도와 달라’고 호소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9일부터 매일 금남로로 나갔다. 그러다 21일 오전 광주MBC가 누군가에 의해 불탄 그날 오후 1시 금남로에 모인 대규모 시위대 선두에 서게 되었다.
오 씨는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뒤로 후퇴를 하니까 군중심리로 인해 뒤쪽에서 시민들이 앞으로 '와~'라는 함성과 함께 밀고 앞으로 나왔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상황에 대해서도 "시위대에 무전병 하나가 잡혀서 곤혹을 치렀다. 아마 총도 뺏겼을 것이다. 그러고 얼마 안 있었는데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총을 쐈다. 총소리와 함께 도망가기 바빴다"고 전했다.
그의 증언은 2007년 국방부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와 일치된다.
이날의 사건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도 주요하게 다룬 장면이기도 하다.
오기철 씨가 1980년 5월 21일의 도청 앞 광장에서 일어난 상황에 대해 그림을 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모습./광주=나윤상 기자 |
그는 전일빌딩 옆 좁은 도로로 도망쳤다. 그러다 앞에 있던 남성 한 분의 종아리에 총을 맞은 것을 목격했다.
오 씨는 "전쟁 영화에서는 군인이 총을 맞으면 그 상태로 몸을 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앞에 있던 그분은 종아리에 총을 맞았는데 그 자리에서 서서 자신의 다리만 찾고 있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로지 자신의 종아리만 붙들고 있는 모습이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총알이 날아오는데 도와줄 수도 없었다. 그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언급했다.
그날 이후 그는 자연스럽게 시민군 활동을 하게 되었다. 시민군으로 여러 가지 역할을 했지만 그가 한 주요 임무는 시신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시신 운구와 관리는 모두 4명이 담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 전남대병원, 조선대병원에 있는 시신을 관에 넣어 도청으로 옮기는 일을 했다. 신원이 확인된 시신도 있었지만 신원불상인 시신도 있었다. 똑바로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한 시신도 있었다.
오 씨는 시신 관리에 대해 "당시 직접 염을 한 사람은 김복수 형이었다. 그리고 운구에는 나를 포함해 총 3명이 있었다. 솔직히 시신 관리 업무를 하고 며칠 동안 밥을 못 먹었다.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광주 장례업체 관을 총동원해도 부족했다. 가장 끔찍한 기억은 시신의 입과 코 등을 솜으로 막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내장이 부패하면서 가스가 발생해 입으로 나왔다. 마치 죽은 사람이 말을 하는 것처럼 솜을 밀어내는데 오싹할 정도로 섬찟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오 씨는 시신 관리를 하면서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죽은 것인가" 하는 회의감도 들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가족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쳐다보는데 구경 온 사람들은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렸다. 그때 죽은 시신을 보면서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해 죽은 것이냐’고 수백 번을 자문했다"며 "이들은 시민들을 위해 죽었는데도 일반 대중의 외면을 받는 것 같아서 슬펐다"고 회상했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금남로 현장 사진. / 5⋅18기념재단 |
그는 27일에 시신관리자 2명과 함께 도청에 남았다. 그들은 본인들이 죽었을 때 깨끗한 모습으로 남고 싶어서 함께 목욕을 했다. 염을 하기 위해 준비한 새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죽으려고 했지만 죽지 못했다. 27일 새벽에 도청에 들이닥친 공수부대원에게 잡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그가 16세의 청소년이라는 사실에 놀랐지만, 그렇다고 다른 일반 성인과 다르게 대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혹독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그는 조사에서 보급품 옮기는 일 이외의 자신이 한 활동에 대해 함구했다. 광주교도소에서 100일 동안 구류돼 있다가 풀려났다.
말을 이어가던 그가 가장 용서하지 못할 사람으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목했다. 김 전 대통령이 학살의 책임자로 지목받는 전직 대통령 전두환 씨와 노태우 씨를 사면한 것에 대한 분노 때문이었다.
차분히 이야기를 하던 그는 취재진에게 되물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싸웠을까요?"
오 씨는 그것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억압이 싫어서 싸웠고 누구에게 통제받기 싫어서 싸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차라리 1980년 5월 27일 그날, 도청에서 죽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 씨는 "살아서 집에 오니 정보과 형사들이 매일 (나를) 감시했다. 사촌 형은 '너 때문에 연좌제로 조카들 앞 길 막았다'고 욕을 했다. 광주 시민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돌아온 것은 멸시와 조롱, 그리고 감시뿐이었다"며 격정을 토했다.
이후 그는 정상적인 일을 갖지 못하다가 2005년에 지인의 소개로 구청 운전직에 취직했다.
오 씨는 "지금도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모르겠다. 광주시민 학살 책임자들은 시민들의 동의 없이 사면되었고, 죽은 사람들은 현재 추앙받고 있는데, 같이 싸웠는데도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아직도 답을 못 찾겠다"고 피력했다.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지 44년이 흘렀다. 기나긴 시간이 지났지만 그가 가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앞선다.
아직도 5⋅18을 폄훼하는 세력들이 준동하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그가 찾고 싶은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회의가 몰려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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