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공수부대는 살인마들...분노 앞서지만 그보다 슬픔이 먼저"
1980년 5월 민중항쟁 당시 광주시민을 살리기 위해 '죽음의 행진'을 한 김성용 신부의 계엄군에 대한 분노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의 분노는 단순한 노여움이 아니고 광주시민이 흘린 피에 대한 슬픔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진은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김성용 신부. / 광주 = 나윤상 기자 |
총칼 앞에서도 '죽음의 행진'을 마다하지 않았던 5월 광주의 정신은 무엇인가? 휴머니즘의 정수인 똘레랑스의 가치를 평생에 걸쳐 설파하며 살아왔던 인문주의자 고(故) 홍세화 작가는 이렇게 답했다. 사람이니까. 5‧18민주화운동 44주기를 맞아 <더팩트>가 5월의 기억을 여전히 부둥켜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 나섰다. 1980년 그날, 광주의 5월은 그랬었고, 또 앞으로도 여전히 숭고한 이들이 피를 바친 희생의 제단 위에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광주시민들에게 공수부대원들은 국군이 아니고 그냥 살인마라고 보면 된다."
5‧18민주화운동이 44년이 지났지만 90세 노신부의 분노는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광주의 '칼레의 시민'으로 지칭되는 오월 항쟁 기간에 '죽음의 행진'을 했던 김성용(90) 신부는 오월 광주시민을 향해 총과 곤봉을 휘둘렀던 진압군을 용서하지 않았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10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 중 26일 '죽음의 행진'은 사회지도층 17명이 다시 광주시내로 진입하려는 공수부대원들과 담판 짓기 위해 목숨을 걸고 광주 농성동에 위치해 있던 계엄군을 향해 행진한 것을 말한다.
당시 행진을 보도하기 위해 따라붙었던 독일 기자가 '죽음의 행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만큼 당시 서슬 퍼런 공수부대를 향한 행진은 죽으러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포위된 프랑스 칼레시를 구하기 위해 나선 지도층처럼 광주시민을 살리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순교자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김성용 신부의 집 한 편에 걸린 1980년 5월 '죽음을 행진' 때 찍은 사진(오른쪽)과 수습대책위원회 사진(왼쪽). / 사진 = 나윤상 기자 |
이 죽음의 행진 속에 김 신부가 있었다. 김 신부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김 신부는 "(부대 앞으로) 가니까 길옆에 흙으로 진지를 싸놓고 기관총을 대 놓았다. 그 양쪽 건물 2층, 3층, 옥상까지 군인들이 올라가서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김 신부는 계엄군을 향해 단호하게 탱크의 위치를 물리지 않는 한 여기에서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은 이미 무용지물이었다.
이후 계엄군은 탱크를 물리고 상무대에서 협상을 했지만 수습대책위원회가 요구하는 사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 신부는 당시 상황에 대해 "상무대에 대표 12명이 가서 4시간 정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군인들이 대화를 하자고 해놓고도 갑자기 30분 안에 끝내자고 억지를 부렸다. 너무 짧은 시간이라고 반발하니까 요구를 들어줬다"고 회상했다.
협상했던 계엄군들에 대해서도 "소장 한 명과 준장 세 명, 헌병대장 대령 한 명이 시민대표 12명과 마주 앉았다"면서 "대변인으로서 자연스럽게 군인들이 잘못한 부분을 마구 지적하니까 소장이 듣기 싫었는지 갑자기 일어나서 문을 열고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 나갔다"고 말했다.
김 신부는 죽음의 행진에서 다시 광주시내로 돌아왔지만 27일에는 광주에 없었다. 수습대책위원회 대변인으로 외부에 광주의 실상을 알려야 한다는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김 신부는 망설였지만 바로 옆에 있던 조비오 신부가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에 광주를 떠나 서울로 향했다. 김 신부는 이를 '엑소더스(exodus·탈출)'라고 비유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민을 구타하고 있는 모습. / 더팩트 DB |
'죄를 범하고 도망한 것도 아니고 살고 싶어서 빠져나온 것이 아닌 야훼의 섭리에 따라 탈출한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김 신부는 광주를 탈출해 서울 교구청에 도착했지만, 심란한 마음에 정리가 안 되고 너무나 참혹한 이야기가 섣불리 말로 옮겨지지 않았다. 그날 밤, 서울 교구청의 한 신부가 위스키 한 병을 주며 한숨 푹 자고 내일 글로 써보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해서 오월 광주의 실상을 정리한 '분노보다는 슬픔이'라는 글이 나왔다.
이 글을 쓴 후 김 신부는 자진 출두하면 불문에 부겠다는 수사당국에 의해 붙잡혀 15년 형을 선고받았다.
김 신부는 교도소 독방에 대해 계절이 딱 두 개만 존재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오로지 여름과 겨울만 존재하는 곳.
김 신부는 한 평 남짓한 독방이 힘들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신앙 그를 좌절하게 만들지 않았다.
김 신부는 "굉장히 추울 때였는데 철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니 이상하게 따뜻한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이 나를 반겨주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마 안 죽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다"고 회상했다.
김 신부는 1981년 8월 14일에 풀려났다.
44년이 지난 지금, 오월 광주의 모습이 그가 남긴 글 마지막 부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광주시민의 흘린 피는 누가 보상할 것이며 어디서 보상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아! 피의 값은 어디에...! 끊일 줄 모르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이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을 어떻게 하면 좋을 것인가. 아... 분노보다도 슬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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