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 '항일투사 후손 특강, 이육사·김학철 듣다' 열려
이육사 딸 이옥비·김학철 아들 김해양 나와 부친 삶 소개
1일 전일빌딩 9층 다목적강당에서 '이육사⋅김학철 듣다' 특강이 열렸다. 사진은 김학철 아들 김해양 씨가 아버지의 삶을 설명하고 있다./ 광주 = 나윤상 |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독립운동가 이육사·김학철 선생의 자녀가 광주시민들과 만나 자신들의 아버지를 이야기했다.
'항일투사 후손 특강, 이육사·김학철 듣다' 행사가 1일 오후 광주 전일빌딩 9층 다목적 강당에서 열렸다.
특강에서는 ‘청포도’와 ‘광야’로 유명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육사(1904~1944)의 딸인 이옥비 여사와 조선의용군 출신으로 소설 ‘격정만리’를 지은 김학철(1916~2001)의 아들 김해양 씨가 나와 일반인들이 알지 못했던 역사 속 인물인 아버지의 삶을 설명했다.
다목적 강당에 1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먼저 나선 이옥비 여사는 아버지 이육사가 북경 감옥에서 돌아가실 때 본인의 나이가 만 3세였다면서 어머니와 삼촌들에게 들은 일화들을 소개했다.
이 여사는 "아버지는 말이 없는 분이라고 들었다"며 "옥에 한복을 보내면 매번 피 묻은 옷으로 다시 와 가족들의 걱정이 많았다"고 일화를 소개했다.
이육사의 본명은 이원록이고 다른 이름으로는 이활이 있으며 육사도 3개의 다른 한자가 존재한다. 이육사는 수인번호로 알려졌지만 정확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광주 = 나윤상 기자 |
이 여사에 이어 마이크를 건네받은 김해양 씨는 "연길에 사는데 영웅의 도시 광주에 와서 기쁘다"며 "중국에서도 5⋅18에 대한 영상을 극장에서 봤었다"고 말했다.
김학철은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1935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야구복을 입고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당시 상해를 떠났던 임시정부를 찾지 못한 김학철은 상해역 앞 조선 여관에 들렀다가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만나게 되어 의열단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당시 의열단은 장개석의 지원으로 독립운동 군사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했는데 1기 졸업생이 이육사고 2기에 정율성, 3기 졸업생이 김학철이다.
김 씨는 "아버지가 의열단 활동을 하게 될 때 정율성 선생을 만나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며 "정율성 선생을 어렸을 때 옆집 아저씨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화에서는 의열단의 거사를 저녁에 하는 것처럼 나오지만 실제로는 낮에 실행이 되었고 열 번을 시도하면 성공률이 세 번 정도 밖에 안 되었다"고 말했다.
의열단에 한계를 느낀 김원봉에 의해 조직된 조선의용군으로 김학철은 태항산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4년 간 감옥에 살게 된다.
남경에 남아 있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터 사진. / 광주 = 나윤상 기자 |
태항산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전향서를 쓰면 다리를 고쳐주겠다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한 탓에 한 쪽 다리를 잘리게 된다.
김 씨는 "아버지 성격이 매우 긍정적인데 어느 날 간수가 잘린 다리를 묻었는데 얕게 묻어서 개들이 당신 다리를 먹고 있어 빼앗아 왔는데 한 번 볼래 라고 하니 그러자 하고 같이 보고 웃었다. 간수는 이번에는 니 무덤을 깊게 해서 묻어줄게 하고 다시 묻었다"는 일화를 들려주면서 "후에 아버지가 작가로 일본에 초청되어 갔더니 일본 기자가 ‘자기 무덤 찾아 온 전사’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다"고 소개했다.
독립운동사 특강으로 유명한 김태빈 선생은 "한반도에 잊혀진 조선의용군이 중국 내에서는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김학철 선생의 ‘조선의용가’는 현재 중국 초등학생들이 한글로 배우고 있다"면서 영상을 보여줬다.
이어 "남한에서는 좌익 빨갱이라고 잊혀지고 북한에서는 연안파 숙청으로 완전히 잊혀졌는데 이념을 넘어 항일투쟁을 한 역사를 이렇게 무시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고 했다.
kncfe00@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