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자식을 키우지만…” 10분간 호통친 판사, 무슨 일이?
법정서 오열한 학부모들 “판사님이 억울한 심정 헤아려줘”
학폭 처분한 구체적 사실 없어…판사도 ‘헛웃음’
광주지방법원 전경/광주지방법원 홈페이지 |
[더팩트ㅣ광주=김현정 기자·김남호 수습기자] "서로 간에 말이 다르게 맞서면 그게 학교 폭력이 됩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자식을 키우지만, 저한테 이런 처분서가 오면 도대체 네가 뭘 잘못했냐는 말이 나올 것 같아요"
지난 19일 광주지방법원 제401호 민사대법정에서 장찬수 부장판사(제2행정부)의 호통이 울려 퍼졌다. 재판부가 ‘학교폭력 조치 결정처분 취소’ 소송 첫 변론기일을 진행한 날이었다.
드라마 ‘더 글로리’와 ‘정순신 아들 사태’ 등으로 학폭에 대한 사회적 공분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광주지법 심판대에 오른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기막힌 사연은 세간의 관심을 끌기 충분했다.
<더팩트> 취재를 종합하면 사건의 발단은 전남 여수석유화학고에 재학 중인 5명의 여학생이 부당한 학폭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여수교육지원청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하면서 였다.
여수석유화학고 1학년 A학생은 평소 기숙사에서 함께 생활하는 친구들에게 청소와 빨래 등을 지시하고 심부름을 시키며 학폭을 일삼아 오다 이들 피해 학생들이 지난해 4월 학폭 상담과 신고 등의 절차를 진행하자 2달 뒤인 6월 먼저 되레 '자신이 B학생 등 11명의 친구에게 집단 따돌림을 당한 피해자'라며 학폭을 신고했다.
B학생 등이 'A학생의 지속적인 괴롭힘으로 힘들다'는 피해 상담에서 '너희들이 참아야지, 어떡하겠니?'라며 학교측이 학폭신고를 받아주지 않았고, 이 사실을 알게 된 A학생이 학교에 학폭 피해를 먼저 접수하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가해자로 지목된 B 학생등은 학폭을 부인하며 오히려 A학생에게 지속적으로 언어 및 사이버 폭력, 이간질 등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학생들은 A학생이 입학전부터 '빨간 안경을 쓴 찐따', '여우같은 X', '남자에 환장한 X' 등의 언어폭력을 일삼고 친구들 사이를 이간질하며, 기숙사 내 전열기구 사용 등 생활 규정도 위반하고 있다고 피해사실을 호소했다.
하지만 학교는 B학생등이 밝힌 피해는 접수하지 않고 A학생의 '집단 따돌림' 신고 내용을 토대로 진위 확인도 없이 학폭을 접수하고 대신 A학생이 지목한 가해자 11명을 6명으로 줄였다.
A학생은 '기숙사 청소나 빨래가 되지 않은 날', '책을 가져다 놓으라는 심부름을 하지 않은 일', '매점에서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은 일', '급식실에서 자리를 옮긴 일' 등을 집단 따돌림 피해라고 주장했다. 이에 가해자로 지목된 학생의 학부모들이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사건이라며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자 학교는 A학생 역시 학폭 가해자로 접수해 사건을 쌍방으로 처리했다.
이후 여수교육지원청은 학교폭력대책심의회를 열고 A학생에게 제16조 제1항 1호(심리상담 및 조언), 2호(일시보호), 6호(피해학생 보호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B학생등 6명에게는 제17조제 제1항, 3항, 9항 1호(서면사과), 2호(접촉, 협박 및 보복행위 금지), 특별교육이수 2시간 처분을 각각 내렸다.
그러자 6명의 학생 중 5명은 부당한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지난해 9월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8개월 만에 첫 재판이 이날 열리게 된 것이다.
재판 시작과 동시에 10여 분간 호통을 이어간 장 부장판사는 "피고(여수교육지원청)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처분 사유가 구체적이지 않다. 처분 사유가 뭡니까?"라고 따졌다.
이어 "어떤 징계처분이 내려지려면 네(B학생 등)가 이런 걸 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질타하면서 "처분을 해야 할 이유가 뭔지, 뭐로 처분을 한 건지 궁금하다"며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장 부장판사는 또 "피해 내용을 하나하나 판단해 조치 결정을 하게 되면 교육적 실익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피해 내용을 하나하나 판단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라며 피고 주장의 모순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피고인 여수교육지원청 관계자는 "이 사건은 1대 6 상황이라 학교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며 "그래서 학교 폭력에 해당한다고 인지를 하고 조치 결정을 하면서 5가지 판단 요소를 봤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장 부장판사는 "5가지 요소를 판단하려면 구체적 사실이 있어야 한다" 면서 "학교폭력이 있었다고 하면 그게 지속성, 강도 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자료가 없지 않으냐"고 되물었다.
또 "서로 주장이 다르면 가려서 처분해야 하는데 뭉뚱그려 처분한 것 아니냐"면서 "쌍방의 말이 다르게 맞서면 그게 학교 폭력이 되느냐"고 묻고 "그건 아니며 저도 자식을 키우지만, 저한테 이런 처분서가 오면 도대체 네(B학생 등)가 뭘 잘못했냐는 말이 나올 것 같다"고 호통을 쳤다.
장 부장판사는 10여 분 만에 재판을 끝내고 한 차례 기일을 더 속행하면서 "처분의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 학폭 처분 취소를 인용하겠다"고 못 박았다.
그러면서 "구체적 사실관계가 있고, 그 사실관계를 토대로 법리를 판단하는 것이 재판 과정인데 여기는 사실관계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피고측 변호인을 향해 "그렇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러자 방청석에서 학생들의 법정대리인으로 참석한 어머니들의 울음이 터졌다. 법정 밖으로 나와서도 눈물을 멈추지 못한 이들은 "판사님이 저희의 억울한 마음을 헤아려 주신 것 같아서…"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재판은 오는 7월 14일 오후 4시 30분에 열린다.
<더팩트>는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킨 이번 사건을 1. 학교폭력 처리 절차 무시…관련법 위반 ‘수두룩’ 2. 변질한 학폭 사건에 ‘돈돈돈’, 노골적 요구 3. ‘법원으로 간 학폭’…처분 위법성 쟁점 4. 학폭사건 축소·은폐·조작에 ‘학부모 분노’ 5.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 ‘학폭’ 등으로 기획 보도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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