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판결 받지 못하고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양영수 할머니 영면
입력: 2023.05.11 17:57 / 수정: 2023.05.11 17:57

2차 소송 원고 대법원 판결 기다리다 11일 별세

미쓰비시 중공업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였던 양영수(93)할머니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던 중 노환으로 11일 별세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미쓰비시 중공업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였던 양영수(93)할머니가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던 중 노환으로 11일 별세했다./ 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더팩트 l 광주=나윤상 기자] 11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2차 손해배상 소송 원고로 나선 양영수(93) 할머니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1929년생인 양영수 할머니는 광주 동구 금동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나 1944년 3월 광주대성초등학교 졸업 후 그해 5월 경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 제작소에 동원됐다.

양 할머니는 생전 "대성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두어 달 뒤 학교에서 연락이 와 가보니 6학년 담임이었던 야마모토라는 일본인 선생님이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공짜로 할 수 있다’며 일본에 갈 것을 권유했다" 며 "당시 오빠는 징용에 끌려갔고 아버지는 일본 순사들의 관심대상이어서 집에 잘 계시지 않아 일본에 조금이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아버지를 덜 괴롭힐 것 같다는 순진한 생각에 갔는데 그 당시 14세였다" 고 회상했다.

야마모토 선생의 말처럼 일본에 가면 돈도 벌고 공부도 공짜로 시켜줄 줄 알았던 일본생활은 절대 외출이라는 것은 없는 징역과도 같은 생활이었다.

양 할머니의 일상은 오전 9시 출근하여 12시 점심, 저녁 5시까지 일하고 끝나면 숙소로 돌아와 6시에 저녁식사를 했는데 숙소환경이 열악하여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식사량도 너무 적어 힘든 하루하루의 나날이었다.

더군다나 어른들도 하기 힘들다는 비행기 부품에 국방색 페인트 칠하는 것이 양 할머니의 일이었다.

양 할머니는 "겨울이면 얼마나 춥던지 손이 깨질 것 같았고 손이 서럽고 추워서 홀딱 홀딱 뛸 정도였고 빨래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고 기억했다.

해방이 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양 할머니는 일본에 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못했다. 자칫 위안부로 오인받을까 두려워서였다.

양 할머니는 2014년 2월 27일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한 두 번째 소송 원고로 참여했다.

2018년 12월 5일 광주고등법원에서 "피고 미쓰비시중공업은 원고들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으며 승소했지만 미쓰비시 중공업 측의 상고로 마지막 대법원 판결 소식을 기다리던 중에 영면했다.

유족으로는 1년가 있으며 빈소는 대구기독병원장례식장이고 발인은 13일이다. 장지는 대구 명복공원이다.

kncfe00@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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