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류기 ‘아름다운 나라 슬픈 미로’ 출판 수익금 전액 클리닉 개보수, 의료기기 구입에 기부
임기를 마치고 올 초 귀국했지만 현지의 뇌성마비 지체 장애 어린이들을 돕고있는 양형일 전 엘살바도르 대사./광주=나윤상 기자 |
[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스페인 식민통치의 아픈 유산을 물려받은 중남미 국가들은 빈부격차, 극심한 부패, 신분차별로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다. 엘살바도르 역시 인디오와 백인 혼혈인 대다수 메스티소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양형일 전 엘살바도르 특임대사는 엘살바도르의 이 아픔을 임기 중 소회를 기록한 저술에서 ‘아름다운 나라 슬픈 미로’(책 표제)로 표현했다. 대사직을 지낸 그의 3년은 어쩌면 ‘엘살바도르의 미로’를 지켜보는 비애였을지도 모른다. 대사직을 마치고도 엘살바도르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돕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양형일 전 대사(전 조선대학교 총장, 17대 국회의원)를 <더팩트>가 만났다.
-3년 동안 엘살바도르 대사를 지내고 올 초 임기 마쳤다. 소회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특명 전권대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생애 가장 큰 보람중의 하나다. 외교 일선에서 국가 간 우호와 협력의 중요성을 깊이 체험한 기간이었다. 기억에 남는 일이 무척 많지만, 그 중 하나를 들면 한일 양국의 미묘한 관계가 일선 외교 현장에서도 재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엘살바도르 한국대사관과 일본 대사관은 평소에 이웃사촌처럼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대사 관저로 직원들을 서로 초청하기도 하고 외교관들이 자주 만나기도 했다. 나 또한 일본 대사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배상 판결을 둘러싸고 양국의 관계가 얼어붙기 시작하자 어느 측이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대사관이 서로 냉랭하게 돌아섰다. 서로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인간적인 친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자국의 입장에 따라 냉정하게 변하는 외교현장을 실감했던 게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다.
-엘살바도르 국민이 보는 한국은
엘살바도르는 과거 경공업 선진국으로 잘 살던 나라였다. 중남미 연방국가 시절 연방의 수도가 산살바도르에 있었을 정도로 국민들의 자긍심도 대단하지만 지금은 경제적으로 어렵다. 국민소득은 5,000불 정도고, 현재 주요 산업은 커피와 설탕 생산이다. 한국과의 교역 규모는 우리가 2억 5천불 정도를 그곳에 수출하고, 1억불 정도를 수입하고 있다. 원조 규모는 한국이 7번째이고 일본 다음으로 원조액이 많다.
엘살바도르 국민 대다수는 한국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본다. 짧은 기간에 부자가 된 나라로 인식되고 있으며, K-POP이나 드라마로 세계적 인기를 얻고 있는 한국을 좋아하고 높게 평가한다. 낯선 사람에게도 ‘꼬레아노’라고 소개하면 엄지 척을 해보인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K-POP에 열광하고 한국 가수들의 이름은 물론 노래가사를 외우고 율동을 따라 하기를 즐긴다.
양 전 대사는 지난 1980년부터 12년 동안 우파와 좌파가 내전을 치르며 경제가 피폐해진 엘살바도르는 한국을 짧은 기간 동안에 부국이 된 나라로 인식하며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고 밝혔다./광주=나윤상 기자 |
-제임 기간 중 전 세계가 코로나 팬데믹으로 힘든 시기였는데 그곳 사정은 어떠했는지
힘들기는 엘살바도르도 마찬가지였다. 방역수준도 우리보다 낮았다. 그러나 원래 기질이 강해서 그런지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은 비교적 크지 않아 보였다. 백신 도입이나 위드 코로나 정책도 우리보다 빨랐다. 우리가 영업시간 제한이나 거리두기를 강력하게 시행할 때 그곳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팬데믹 기간에 일시 귀국한 적이 있는데 방역 조치로 입국절차가 미국이나 엘살바도르에 비해 너무 복잡하고 엄격해서 놀랐을 정도다.
-대사직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곳 뇌성마비 어린이들을 돕는 구호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에서 지원사업과 연을 맺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면
엘살바도르는 1980년부터 12년간 우파와 좌파가 싸우는 내전을 치렀다. 내전으로 경공업에서 가장 앞서가던 나라가 경제적 파산을 겪었다, 그때 양산된 극 빈곤층의 문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한 어려움 중 하나가 버려진 아이들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빈곤층에서 신체적 장애를 지닌 아이들은 케어할 수가 없다. 우연히 들른 뇌 병변 고아 수용시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떻게든 도와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임기를 마치고 귀국했지만 그 시설을 지속적으로 도울 수 있는 길을 모색 중이다.
양 전 대사의 기부로 개보수를 마친 클리닉 오픈 테이프를 끊고 있는 양형일 전 대사(사진 가운데)./양형일 제공 |
-지난 7월 사진 전시회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그 수익금을 전액 엘살바도르 뇌성마비 어린이를 돕는 기금으로 현지에 직접 가서 전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임기를 마치고 오기 직전, 그 시설에 들러 클리닉을 개보수해주기로 무작정 약속을 했다. 공사를 바로 착수하도록 했다.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야 했다. 출판기념회를 통해 책을 팔기로 하고 현지에서 경험했던 일을 토대로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광주 집에 오자마자 석 달 동안 두문불출하고 썼다. 376페이지에 달하는 적지 않은 분량이다.
그곳에서 찍은 아름다운 일출 사진을 모아 사진전과 함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선한 취지에 많은 분들이 동참해주셔서 기대 이상의 큰 금액을 모았다. 금액을 밝히기는 쑥스럽다. 달러 환율이 크게 올라 부담이 컸지만, 클리닉 개보수 비용에 더불어 의료기기까지 추가로 지원할 수 있었다. 나는 전달자에 불과하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지만 크게 도움을 주신 한분만 이 자리를 빌어 꼭 소개하고 싶다. 창원한마음병원 하충식 이사장님이다. 내가 조선대학 총장을 지낼 때도 대학에 십 수억을 기증하셨고, 이제까지 수많은 기부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앞장서서 실천하신 분이다, 이번 일에도 매우 큰 금액을 지원해주셨다. 감사드린다.
클리닉 개보수로 산뜻해진 병실./양형일 제공 |
-그곳 체류기를 담아 펴낸 책 제목이 ‘아름다운 나라 슬픈 미로’이다. 엘살바도르가 겪고 있는 미로의 실체는 무엇인지
‘슬픈 미로’는 중남미 국가들의 공통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강제 점령으로 식민지가 되었던 중남미는 아직도 소수 백인계가 정치와 경제 등 모든 것을 소유 지배하고 있다. 빈부 격차와 부패가 극심할 뿐만 아니라, 신분차별 또한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인디오와 백인 사이에 태어난 메스티소들은 혼혈로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
엘살바도르도 예외가 아니다. 다수인 메스티소들은 삶의 미래가 보이지 않고 가난하고 피곤한 현실을 대대로 감내해야 한다. 타고난 힘든 운명의 족쇄가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다는 의미에서 ‘슬픈 미로’라고 표현한 것이다.
-조선대학 총장을 역임하시고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적지 않은 시간동안 외국에 체류하면서 한국정치를 보는 생각에 변화가 있다면
멀리서 보면 더 잘보인다는 말처럼 해외에서 보면 한국이 더 잘 보인다. 답답함을 느꼈다. 정치가 희망을 심어야 하는데, 희망은커녕 나라와 국민을 볼모로 잡고 극심한 정쟁의 연속이다.
코로나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신 냉전 국제환경, 경기침체 등의 여파가 심각하게 한국을 위협하고 있지만, 정치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쟁에 매몰돼 있는 게 우리 현실이다.
세계가 격동 급변하던 때에 당파싸움으로 나라를 잃었던 과거 역사를 한국정치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우리 정치를 보면, 우리도 ‘슬픈 미로’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른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forthetrue@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