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이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광주전남 31명 피해자들의 생생한 육성 증언을 담은 구술집을 펴냈다. 사진은 구술집 표지./시민모임 제공 |
도쿄에서 남양군도까지…광주전남 강제동원 31명이 겪은 가슴 아픈 사연 첫 공개
[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광주·전남지역에서 국외로 강제징병·징용된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담은 구술집이 발간됐다.
‘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은 지난 23일 강제동원 기록구술집 ‘배고픔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하얗게 핀 가시나무 꽃 핥아먹었지’를 펴냈다.
구술집은 1942년부터 1945년 사이 군인(8명), 군무원(8명), 노무자(9명), 여자근로정신대(6명)로 강제동원 된 31명의 피해자가 겪었던 역사적 아픔과 어긋나 버린 삶의 행로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아카시아 꽃이 3월 달이면 하얗게 피어요. 가서 고놈 핥아먹느라고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일 안 나가고 고놈 핥아먹느라고. 아, 고놈이라도 핥아 먹은께 살 것 같드란 말이요."(권창열)
구술집은 가슴 아픈 사연들을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피해자들이 처했던 상황과 일제의 만행을 파악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구술집에 기록된 강제동원 피해자 중 군인은 8명이며 대부분 1924년레 태어난 ‘묻지마 갑자생’이라는 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1944년 징병제 시행 첫해 만 20세로 징병 영장을 받고 일본, 중국, 대만, 필리핀, 베트남 등지의 전투현장으로 투입됐다.
군무원으로 동원된 8명은 취업 또는 기능공 양성 교육, 군사훈련을 받다가 연행됐으며, 일본 도쿄, 가고시마, 오키나와, 나고야 등 군사시설은 물론 남양군도까지 끌려갔다. 노무자로 동원된 9명은 탄광(3명), 군수회사(4명), 농사보조 노무원, 방공호 공사장에서 강제로 노동했다.
여자근로정신대 6명 중 3명은 아이치현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로, 2명은 도야마현 후지코시강재 회사로 동원됐다. 나머지 1명은 만주 봉천에 있는 삼양사가 설립한 남만방적 공장으로 동원됐다.
구술증언에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징병검사에서 제2 을종으로 군 면제 대상인데 징병되거나(이경석), 해방되고 일본 공장에 돈 받으러 갔다가 쫄딱 망했는데 뭔 돈이 있겠냐며 못 받기도 했다(이춘식). 노무자를 뽑아 일본에 보내는 담당이 형님인데 나를 보내고(조주호), 일제 순사의 동생을 대신해 끌려가기도 했다(양오섭). 결혼 보름 만에 영장이 나오거나(최영균), 해방되던 해 먼저 징용 간 형님이 아무 말 없이 혼자 귀국(김준수)한 사례 등이 가슴을 적신다.
일본에 가면 공부도 시켜주고 돈도 벌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끌려간 어린 소녀들의 사연은 특히 심금을 울린다. 안 간다고 하면 너희 아버지, 어머니 다 경찰서 잡아 가둔다(양금덕)는 협박과 일본에 가면 밥도 배부르게 먹여주고 공부도 시켜준다(김재림)는 감언이설에 속아서 일본에 갔지만 배가 고파서 한국에서 가져 간 옷하고 밥하고 바꿔 먹고(곽옥남), 지진이 일어나 담도 허물어지고 고놈 밑에서 두 명이 깔려 죽고(정신영), 공습이 오믄 죽을둥 살둥 저녁 내내 날 샐 때까지 도망다녔다(주금용)는 증언도 있었다.
그래서 주금용 할머니는 후지코시로 끌려간 어린 소녀들이 "후지코시 좋다고 누가 말했나. 벚꽃 나무 그늘 아래서, 인사과 기무라가 말한 듯 하다, 나는 감쪽같이 속았다"는 신세 한탄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고도 했다. 또 만주 봉천 남만 방적에서 일한 오연임 할머니는 "2년 동안 일하고 검은 고무신 하나 산께 아무 것도 없었다"고 한탄했다.
시민모임은 "기억을 남기는 것은 두 번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삼기 위해서"라며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분들을 위해 오늘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인가 되묻기 위해서다"고 출간 취지를 밝혔다.
구술집에 기록된 피해자 가운데 정유한, 김오곤, 조주호, 전홍일, 남정노, 권충훈, 곽옥남 등 7명의 피해자는 안타깝게도 구술집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피해자들이 고령으로 세상을 등지거나 질병 등으로 증언이 어려운 점을 감안하면 이번 구술집이 마지막 육성 증언이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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