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화운동 ’큰 별‘ 지다…강신석 목사 5일 별세
입력: 2021.02.06 15:45 / 수정: 2021.02.06 15:45
한국민주화운동의 큰 별 강신석 목사가 5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평생을 민주화운동, 종교, 교육, 통일운동, 인권 등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겨 광주 시민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 장례위 제공
한국민주화운동의 '큰 별' 강신석 목사가 5일 8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고인은 평생을 민주화운동, 종교, 교육, 통일운동, 인권 등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겨 광주 시민사회의 존경을 받아왔다./ 장례위 제공

시민사회 ”그는 민주화운동의 후원자가 아닌, 투쟁의 일선에 선 총 감독이었다“

[더팩트ㅣ광주=박호재 기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큰 별이 졌다.

5·18진상규명 등 민주주의 발전과 인권 신장을 위해 일생을 바친 강신석 목사가 84세 일기로 별세했다.

강 목사는 1994년 YMCA 이사장, 1998년 한빛고 이사장, 2003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2004년 조선대학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강 목사의 이러한 경력은 제도권의 수면 위로 드러난 극히 일부의 경력일 뿐,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광주시민사회에 회자되고 새겨진 수난의 기록이야말로 강 목사의 진면목을 알리는 경력일 것이다.

고인은 1938년 8월 24일 ,강주원 목사의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나, 대성 초등학교, 광주서중, 광주고, 한신대를 졸업했다. 이후 민주화 투쟁, 종교, 교육, 통일 등 전반에 걸친 사회활동에 헌신해오며 광주의 큰 지도자로 족적을 남겼다.

1963년 해남 송석교회에서 목회를 시작, 당신이 개척했던 광주 무진교회에서 2007년에 자진 은퇴할 때까지 목회자로서 평생을 보냈다.

1976년 목포 연동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광주 양림교회에서 열린 노회에서 유신반대 성명을 낭독하여 1년여를 수감 뒤 특별사면 됐다. 이어 긴급조치로 다시 4개월의 수감생활을 했다. 독재정권에 요주의 민주화 운동 인사로 이름을 올린 강 목사의 시련은 이후에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전두환 신군부 세력에 의해 5월 17일 예비검속 명단에 포함됐으나 피신하여, 서울에서 주한 독일대사 등을 만나 학살 만행을 폭로했다. 이 일로 상무대 영창에서 함께 구금된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폭도로 불리며 혹독한 대접을 받았다.

1980년 12월 30일부터 제1회 '고난당한 자와 함께 드리는 예배를 시작, 2001년까지 22년 동안 민주화에 헌신했다. 한편으로 미전향 장기수들을 후원했고, 출소 후에도 이들을 보살피는 일에 전력을 다했으며, 북송을 원하는 장기수들의 송환 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전교조 출범과 해직교사들의 뒷바라지에도 갖은 노력을 다 했다. 한국실로암선교회 회장을 역임하며 시각장애인들의 복지와 인권 향상을 위해 애썼으며 목회뿐만이 아니라 교육과 민주화와 통일 분야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 참교육상과 제 25회 한신상을 수상했다.

고인은 5ㆍ18유족회 및 5ㆍ18민주화운동 부상자회의 전신인 5ㆍ18광주의거 부상자회 등 5ㆍ18 정신계승 관련 단체들의 탄생에도 산파역할을 했다. 이들 단체들의 창립 거점이 모두 강 목사가 담임목사였던 무진교회(광주 남동)였다.

1995년 고 강신석 목사(사진 가운데)가 전두환 등 광주학살 주범들을 처벌하는 5.18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장례위 제공
1995년 고 강신석 목사(사진 가운데)가 전두환 등 광주학살 주범들을 처벌하는 5.18특별법제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있다./ 장례위 제공

전남도청과 함께 광주항쟁의 최후의 보루였던 YWCA가 독일 기독교재단의 후원으로 1984년 유동에 신사옥시대를 열었을 때, 고 조아라 여사와 강 목사의 지원으로 사무실이 없는 민주화운동 및 시민 사회단체들이 6층 전체를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강 목사의 민주화운동 경력의 금자탑은 5‧18특별법 제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특별법제정 운동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이 공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노태우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1995년. 당시 3당합당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 문민정부는 5ㆍ18문제는 역사에 맡기자고 했고,검찰 역시 성공한 구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이에 광주의 민주화운동 단체들은 전남 도청 앞에 농성텐트를 설치하고 명동성당 앞에서 사진전시와 홍보전을 펼치며 투쟁에 나섰다.

적지 않은 투쟁자금이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정권의 탄압에 의해 내부 조직역량이 위축될대로 위축된 상황이어서 자금을 충당하는 일은 난제였다.

당시 특별법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연극인 이지헌씨(사진 맨 오른쪽 눈가리개 쓴 이) 는 "살아계실 때는 당신의 천성적 겸손때문에 숨겼으나 이제는 말을 해도 될 것 같다. 1995년 5ㆍ18공대위 상임의장을 맡으며 ,투쟁의 종잣돈을 만들 때, 버팀목이 되어주신 분이 바로 강신석 목사님이었다"고 말하며 "그 분은 투쟁의 후원자가 아닌 사실상 민주화 투쟁의 총감독이었다"고 회고했다.

강 목사의 소천 소식에 각계의 조의도 답지하고 있다.

이용섭 광주시장은 6일 발표한 애도문에서 "서슬 퍼런 유신독재의 탄압도, 80년 5월 신군부의 참혹했던 군홧발도 민주주의를 향한 고인의 간절한 염원과 의지를 꺾지 못했다. 그렇게 고인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고 고인의 공적을 되새겼다.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대표도 5일 페이스북 게재 글에서 "‘민주화운동 거목' 강신석 목사를 추모하며, 목사님께서 뿌리신 민주와 정의의 씨앗들을 저희들이 가꾸고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빈소는 조선대학교 병원 장례식장 101호에 마련됐으며, 광주YMCA 등 시민사회는 강 목사의 장례를 민주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forthetrue@tf.co.t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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