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여자의 일’ 틀린 공식
조선시대 궁중 요리사 대부분 ‘남성’
[더팩트ㅣ선은양 기자] "옛날 왕가에서나 뼈대 있는 좋은 가문 이런 데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남자 손으로만 제사 준비를 했대. 우리 회장님이 또 ‘왕가의 전통’ 이런 거 좋아하셔 가지고…."
지난 9일 첫 방송된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 1회에는 재벌 일가인 ‘퀸즈그룹’ 가문의 사위들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제사상을 차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면 며느리들이 차례·제사 음식을 만드는 유교 문화를 유쾌하게 비튼 장면인데요. 무턱대고 시킬 순 없으니 사위들에게도 ‘전통’을 강조합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시대 제사는 유교 문화에 입각해 여자들이 제사 음식을 차리면 남자들이 제사를 지내는 모습인데, 이 편견을 뒤집는 장면과 대사는 사실일까요?
tvN 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재벌 일가인 '퀸즈그룹' 가문의 사위들이 제사 음식을 만들고 있다. /tvN 캡처 |
일부 사실입니다. ‘조선시대 요리사’ 하면 우리는 ‘대장금’을 떠올리지만 사실 조선시대 왕궁에서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남자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사상에 따라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고, 궁에서 요리를 하는 일은 일종의 바깥일 ‘직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대령숙수(待令熟手)’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숙수’는 ‘잔치 때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뜻하고 ‘대령’은 임금의 명을 기다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민가에서 잔칫상을 준비하거나 궁궐의 외소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남자 요리사를 ‘숙수’라고 불렀고, 그 중에서도 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먹는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을 ‘대령숙수’라고 불렀습니다.
조선 후기 궁궐(창덕궁,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통궐도(고려대학교 소장본)에는 창덕궁 인정전 옆에 소주방, 외주방, 내주방, 수라간 등 왕실 사람들의 음식을 만들던 여러 건물들이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 |
조선시대 왕실에서 요리를 하는 일이 남자의 일이었다는 사실은 사료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 따르면 음식을 만드는 수라간의 남녀 성비는 15대 1 정도로 남성이 많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세종 13년에 명나라가 요리를 할 줄 아는 처녀들을 요구하자 세종이 "우리나라에서는 궁중의 요리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다 남자로서 부녀들이 아는 바가 아니며"라고 말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궁중 요리를 남자에게 맡긴 이유는 궁중에 제사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 제사는 권력자가 누리는 권위의 상징이었기에 제수 준비와 상차림을 모두 남자들이 해야 했습니다. 이는 왕가뿐 아니라 4대조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사대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밖에 평민들은 여자들이 주로 요리를 했지만, 조선시대에는 백성들이 기제사를 제외하고는 제사를 지낼 수 없었기 때문에 여자들이 제사상을 차릴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경국대전 예편’에 따르면 관리를 제외한 일반 백성들은 부모 제사만 지내야 했습니다. 기제사마저도 형편에 맞는 수준으로 간소하게 지냈다고 하니, 고위층의 전유물인 ‘제대로 된’ 제사는 드라마의 대사처럼 남자들의 손으로 지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이래서 전통과 미래는 통한다고 하나봐." 극 중 대사처럼 요즘은 요리 등 집안일을 함께 하는 남편들이 늘어나고 차례상이나 제사상은 차리지 않거나 간소화하는 추세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다르지만 전통과 트렌드는 어느 정도 맞닿아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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