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군청 여자씨름단 인터뷰
"씨름의 매력? 상대를 넘길 때죠"
"남자씨름처럼 여자씨름도 엘리트 교육해야"
괴산군청 여자씨름단 선수들이 갑진년 2024년을 앞두고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김채오·임정수·강하리·이재현·김지한·김다영 선수. /괴산=김세정 기자 |
[더팩트ㅣ괴산=김세정 기자] 초인종을 누르니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우렁찬 인사와 함께 현관에 놓인 각양각색의 운동화가 낯선 이를 반갑게 맞이한다. "새벽부터 멀리까지 온다고 고생하셨어요"라며 따뜻한 차를 내어주자 추위에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세탁기와 건조기 소리 사이로 훈훈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겨오는 곳.
그곳엔 도전을 두려워 않는 여성들이 산다. '장사(壯士)'를 꿈꾸며 쉬지 않고 달리는 이들. <더팩트>는 '청룡의 해' 갑진년을 앞두고 충북 괴산군청 여자씨름단을 만났다.
거창할 것도 없는 인터뷰지만 선수들은 옅게 긴장을 머금고 있다. 간만의 '다대일' 대담이 긴장되긴 기자도 마찬가지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분위기 메이커는 맏언니 임정수(32) 선수와 둘째 김채오(29) 선수다. "서울 어디 사세요?" "직접 운전하셨어요?" "카메라 한번 봐도 돼요? 완전 잘 나와요." 활력 넘치는 질문에 MBTI '극I(?)' 기자도 점차 에너지를 얻는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의 이재현(28) 선수와 이름만큼 강인해 보이는 강하리(26) 선수, 팀 살림을 도맡아하는 '똑쟁이 주장' 김지한(24) 선수, 의젓한 막둥이 김다영(24) 선수까지 모두 여섯명의 선수들이 합숙소 식탁에 빙 둘러앉는다.
◆여섯 선수, 자기소개를 부탁해
늘 그렇듯 첫 순서는 자기소개다. 아직은 생소한 여자씨름, 여섯 청년은 어쩌다 모래판을 밟았을까.
태백(80㎏ 이하), 금강(90㎏ 이하), 한라(105㎏ 이하), 백두(140㎏ 이하) 등 4개 체급인 남자프로씨름과 달리 여자씨름은 매화(60㎏ 이하), 국화(70㎏ 이하), 무궁화(80㎏ 이하) 3개 체급으로 나뉜다. 김채오·이재현 선수가 매화급, 강하리·김지한 선수가 국화급, 임정수·김다영 선수가 무궁화급이다. 이재현 선수를 제외하곤 모두 유도선수 출신이다.
동갑내기 김지한 선수(왼쪽)와 김다영 선수는 체육고교 출신으로 고교 시절까지 유도를 하다 성인이 된 후 씨름에 입문했다. /괴산=김세정 기자 |
열심히 훈련 중인 김다영 선수. /괴산=김세정 기자 |
동갑내기 지한과 다영(이하 선수 호칭과 성을 제외하고 이름만)은 체육고교 출신으로 고교 시절까지 유도를 하다 성인이 된 후 모래판에 들어왔다. 하리는 고교 시절 유도를 관뒀다. 쓰디쓴 실패의 기억 때문인지 누구보다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지만, 체육관 관장의 권유로 2017년 샅바를 잡게 됐다.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까지 유도를 하던 채오는 대학 감독의 제안에 2015년 씨름에 입문했다. 생활체육으로 씨름을 하다 연습생 신분을 거쳐 2017년 거제시청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화성시청에서 2021년 1월 괴산군청으로 옮겨 팀 창단멤버가 됐다. 유도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인 정수. 한국체대를 졸업한 뒤 고창군청에서 실업팀 선수로 활동하다 2017년 은퇴했다. 이후 두 번의 사업 실패 등 격동의 삶(?)을 살던 그는 얼떨결에 나간 생활체육 씨름대회에서 우승을 하면서 유도 은퇴 4년 만에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재현은 대학생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케이스다. 대학에 가려고 체대 입시를 시작했고, 점수에 맞춰 격기지도학 전공으로 입학했다. 씨름계 전설로 불리는 이태현 교수를 은사로 만나면서 씨름에 눈을 떴다. 괴산군청 창단과 함께 프로에 데뷔했다. 엘리트 체육을 한 적이 없기에 기초체력이나 근력이 부족해서 남들보다 쉽게 지쳤다. 매일같이 산을 오르며 악착같이 체력을 길렀다고 한다.
김채오 선수는 2022년 세차례 장사에 등극했다. 2023년 12월부로 팀을 떠난다. /괴산=김세정 기자 |
◆헤어 나올 수 없는 씨름의 매력
씨름단의 하루는 매일 오전 8시 시작된다. 아침 식사 뒤 9시30분부터 웨이트 운동을 한다. 오전 운동을 마치고 정오에 점심을 먹는다. 씻고 잠시 쉰 후 3시부터 5시까지 훈련. 이후 저녁 식사 뒤 7시부터 8시까지 야간 운동을 한다. 대회를 앞두고는 훈련에 더욱 매진한다.
처음 씨름을 시작할 땐 어려운 점도 많았다. 사타구니를 한껏 조이는 샅바에 살갗이 벗겨지기도 했고, 샅바 자국대로 피부가 검게 변하기도 했다. 재현은 "허벅지 안쪽 이런 부분이 그대로 멍이 들었다. 사람이 손을 샅바 안으로 넣어서 잡아당기니까 피부도 엄청 쓸렸다"라고 말했다.
모래의 질감도 적응이 힘든 부분 중 하나였다. 정수는 "씨름장 가면 발이 차가워서 힘들었다. 고운 모래는 괜찮았는데 굵은 모래는 아팠다"라고 했다. 재현은 "모래가 발에 너무 꼈다. 발톱에 낀건 솔로 문질러야 빠진다"고 말했다. 설날을 시작으로 1년에 대회가 15개 정도 있는 탓에 월경도 버거울 때가 있다. 잦은 부상 역시 힘든 지점이다.
선수들은 잦은 부상에 시달린다. 곳곳에 멍이 든 강하리 선수의 무릎. /괴산=김세정 기자 |
그럼에도 선수들은 씨름에 푹 빠졌다. 모래판 위 찰나의 순간을 위해 힘든 훈련을 매일 이겨내고 고통을 감내한다. 여느 겨루기 운동과 달리 씨름은 상대를 가격하지 않는다. 청샅바와 홍샅바를 각각 맨 선수들은 서로의 몸을 맞댄다. 상대를 먼저 모래에 닿게 하기 위해 1분간 기술(현재 씨름 공식 기술은 손기술 10개, 다리기술 7개, 발기술 8개, 허리기술 7개, 들기술 9개, 혼합기술 14개 등 총 55개로 구성)을 겨룬다. 규칙이 비교적 간단하고 1분이라는 짧은 순간에 승부가 명확히 갈리는 점이 씨름의 매력이라고 선수들은 입을 모은다. 또 상대 선수를 넘길 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벅찬 감정이 끓어오르기도 한다.
"상대를 넘겼을 때 희열감이 생겨요. 상대랑 저랑 비슷하게 넘어간 것 같은데 저는 안 닿았는데 상대방은 모래에 닿았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때 딱 심판이 제가 이겼다고 하면 가슴이 벅차죠."(채오) "시합을 준비할 때 상대 선수 기술을 영상 보고 분석하잖아요. 내가 이 선수에겐 이렇게 하고, 어떤 선수에겐 저렇게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진짜 경기에서 그렇게 해서 넘기면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정수) 채오는 2022년에만 매화급에서 3번의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정수도 지난해 10월 거제장사씨름대회에서 무궁화급 장사에 등극했다.
오전 일정 후 이광석 감독과 점심 식사를 하는 선수들. 이날 메뉴는 중국음식이다. /괴산=김세정 기자 |
◆ 여자씨름, 힘찬 비상을 꿈꾼다
선수들의 갑진년 목표는 장사다. 누군가는 '천하장사'도 꿈꾼다. 그러나 더 간절한 꿈이 있다. 바로 저변 확대다. 여자씨름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괴산군청을 비롯해 안산시청, 화성시청, 영동군청, 구례군청, 거제시청 등 전국에 6개 여자씨름단이 생겼다. 지난해 처음으로 전국체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다영은 첫 전국체전에서 준우승). 선수들은 여자씨름의 거센 돌풍만큼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괴산군청 선수들처럼 유도 등에서 전향한 선수들이 대부분이고, 성인 이하에선 체계적인 교육을 받긴 어렵다.
"남자씨름처럼 여자씨름은 엘리트 교육이 없어요. 초등학교 내지는 중학교, 고등학교부터 선수 육성을 체계적으로 한다면 지금보다 여자씨름이 훨씬 더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전국체전도 생겼으니까 중·고등학교 시합도 열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정수) "여자씨름 경우엔 14세 이상부터 다 통합해서 시합해요.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우더라도 시합을 나갈 수 없으니까 아이들이 다 그만둬서 유지가 잘 안 돼요. 어린 학생들 시합부터 만들어서 꾸준히 육성한 다음에 학년별로 나눌 수 있는 그런 제도가 필요한 것 같아요."(재현)
김채오 선수와 이재현 선수가 팀을 떠나는 날. 창문을 바라보고 있는 이 감독의 뒷모습. /괴산=김세정 기자 |
김채오 선수와 이재현 선수는 군청을 찾아 "그간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괴산=김세정 기자 |
인터뷰가 진행된 날은 채오와 재현의 팀 생활 마지막 날이었다. 채오는 "씨름선수로서 목표가 장사였다. 작년에 장사를 하고 나니까 올해는 목표를 못 세우고 있었다. 또 결혼한 지 2년인데 합숙 생활을 하다 보니까 주말부부가 됐다. 주말부부 생활이 힘들었다"라고 말했다. 재현은 "제가 부상이 잦았다. 지난해에는 발가락이 부러지고 올해는 무릎도 나가고 계속 다치다 보니까 그런 문제 때문에 은퇴한다. 장사를 못한 게 아쉽지만 괜찮다. 남은 선수들이 다들 안 다치고 목표하는 바까지 도달했으면 좋겠다"라며 미소 지었다.
☞ 괴산군청 여자씨름단은? 2021년 1월 창단. 중원대 씨름부 감독이었던 이광석 감독이 팀을 이끌고 있다. 매화급(60㎏ 이하) 김채오·이재현 선수, 국화급(70㎏ 이하) 강하리·김지한 선수, 무궁화급(80㎏ 이하) 임정수·김다영 선수가 있다. 2023년 12월부로 김채오 선수와 이재현 선수가 은퇴했으며 최다혜 선수(매화급), 노현지 선수(국화급)가 새로 합류했다.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gs_wm_ssireum_official)을 통해 팀 소식을 만나볼 수 있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