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션 받으러 제작사에 프로필 한 장씩
성공 어려워도 연영과 입시 해마다 치열
"K콘텐츠 전성기 구가…연예인 선망 때문"
소속사가 없는 무명배우는 오디션 기회를 얻기 위해 프로필을 돌린다. 사진은 대종상 수상작 포스터가 걸린 충무로역의 모습. /김세정 기자 |
전세계 한류 열풍에 칸영화제 남녀 주연배우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대한민국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수많은 '희극지왕'이 있다. 무명의 고단함을 이겨내며 연기의 꿈을 키우는 이들이다. <더팩트>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왜 이처럼 배우의 길은 바늘구멍일 수밖에 없을까. 그 구조적 문제까지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추석 연휴를 앞둔 어느 날, 무명배우 K는 '프로필 투어'를 한다. 며칠 전 인쇄소에서 출력한 프로필 20여 장을 에코백에 넣었다. 편한 운동화를 신고 오전 10시께 집을 나섰다. A4사이즈 종이에는 K의 인적 사항부터 연락처, 키와 체중 등이 적혀 있다. 출연한 작품 리스트와 함께 바스트 , 클로즈업, 측면 사진이 빼곡히 담겼다.
K는 이날 논현동에 있는 제작사를 먼저 찾았다. 일명 '프로필 박스'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상자에 빳빳한 프로필 한 장을 간절한 마음으로 넣고 돌아선다. 신사동부터 잠원동, 삼성동 등 강남 이곳저곳을 빠른 걸음으로 누빈다.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랜 뒤 한강을 건넌다. 홍대와 상암동을 찍고, 오후 6시가 됐다. 따끈한 국밥 한 그릇으로 투어를 마무리한다.
이름을 들어본 배우라면 작품 제의가 먼저 오겠지만, 무명배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K처럼 소속사가 없는 무명배우는 직접 발품을 팔고 기회를 찾아야 한다. 무명배우에게 프로필 투어는 숙명과도 같다.
◆ "100장 돌려도 연락 안 와"
제작사나 영화사에 프로필을 놔두면 간혹 연락이 온다. 이후 몇 번의 오디션을 거쳐 배역을 따낸다. 하루 종일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수고로운 일이기 때문에 지인 차를 얻어 타고 여러 명이 같이 다니기도 한다. 최근에는 프로필을 대신 내주는 대행업체가 생겨나기도 했다.
<더팩트>가 만난 다수의 무명배우는 꾸준히 프로필을 돌린다고 밝혔다. 다만 100장을 돌리면 한 번 연락을 받을 정도라고 입을 모았다. 그럼에도 경력에 한 줄이라도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인쇄소를 찾는다.
김원식(36) 씨는 20대 중반부터 프로필을 돌려왔는데 2년 전 처음으로 연락을 받았다. 원식 씨는 "종이도 두꺼워야 하고, 색깔도 잘 나와야 하는 것 같다. 영화사 앞에 가면 한가득 쌓여 있다. 연락받았다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으니까 '내 프로필은 대체 뭐가 문제일까'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무명배우는 "종이만 넣고 조용히 나오는데 조금 아쉽기도 하다. 연락을 못 받아도 상처받지 않으려 한다"고 밝혔다.
제작사나 영화사 입구에 마련된 박스에 프로필을 놔두면 간혹 오디션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온다. /김세정 기자 |
◆ 한예종 연기과 37명 뽑는데 5000명 넘게 몰려
이들은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 학교만 들어가면 잘 풀리지 않을까, 괜찮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원하던 대학 타이틀을 얻기 위해 'n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잔인했다. 배우로 성공한 동기는 손에 꼽힌다. 대다수는 진로를 변경하거나 연기학원 강사 일을 시작한다. 배우의 꿈을 이어가는 이들은 투잡, 스리잡을 뛰며 산다.
예전에 비해 OTT나 웹드라마 등 연기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더 늘어났지만, 지망생이 그보다 더 늘어나 경쟁도 심해지는 것 같다고 무명배우들은 말한다.
한국교육개발원의 교육통계서비스에 따르면 2023년 전국 4년제 대학의 연극영화 관련 학과는 118곳에 달한다. 연출 전공자도 포함돼 있지만 올해 입학생은 모두 2273명이고 재적 중인 학생수는 1만3330명이다. 졸업생은 2229명이다. 전문대의 경우 81개 학교에 연극영화 관련 학과가 개설돼 있으며 5099명이 재적 중이다. 올 한해 입학생은 1550명이며 1058명이 졸업했다. 4년제와 전문대를 종합하면 현재 전국 연영과에 적을 둔 학생수는 1만8429명이고, 2023년에만 3823명이 입학했다.
경쟁률도 어마어마하다. 2023학년도 4년제 연극영화 관련 학과 정원 내 모집인원은 2072명이었는데 5만1434명이 지원했다. 25대 1의 경쟁을 뚫어야 입학할 수 있었다. 전문대의 경우 정원 내 1420명을 모집했고, 1만9456명이 지원했다. 중복지원자도 있겠으나 정원 외 인원까지 합치면 한 해 7만3000여 명 넘는 학생들이 연극영화과 입시에 몰렸다.
유명 대학이라면 경쟁은 더 치열해진다. 2010년대 들어 걸출한 배우들을 배출하고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경쟁률은 엄청나다. 한예종에 따르면 2024학년도 연극원 연기과 입학정원은 37명인데 모두 5083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137대 1이다. 경쟁자 136명을 제쳐야 입학할 수 있는 셈이다. 2023학년도에는 5217명이 응시해 141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1차, 2차 시험을 거쳐 최종 선발되며 1차에서 300명 안팎으로 추린다.
모 제작사 입구에 프로필이 쌓인 모습. /김세정 기자 |
◆ 배우 삶 열악한데 왜 과열되나…"연예인 선망 때문"
한국고용정보원의 2020 대졸자 취업정보에 따르면 4년제 연극영화 관련 학과를 졸업한 1923명 중 정규직 직업을 얻은 이들은 35.3%였다. 취업자의 월평균 소득은 167만원 정도다. 공학계열 272만원, 인문계열 219만원, 사회계열 249만원, 자연계열 221만원에 비해 낮은 수준이다. 예체능계열의 평균 215만원보다도 낮다. 연극영화과 졸업 후 첫 직장을 얻은 이들의 57.5%는 월평균 150만원 이하의 수입을 얻었다.
고용정보원이 조사한 2021 한국의 직업정보를 살펴봐도 연기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연극·뮤지컬배우의 연 평균소득은 2223만원으로 소득이 낮은 직군에 위치했다. 청소원과 육아도우미, 가사도우미가 각각 2200만원, 1936만원, 1872만원으로 뒤를 이었다. 주차관리원(2233만원), 주방보조원(2265만원)보다 적게 벌었다.
고된 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 청년들은 배우가 되려 할까. 전문가들은 한류 콘텐츠 전성기와 더불어 연예인 선망 현상이 심해졌다고 진단한다. 다른 일을 택하더라도 성공하기란 쉽지 않아서 배우가 매력적 선택지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한국 연예 산업이 유례없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고 우리 연예인이 세계적 빅스타가 되고 있다. 청소년들이 연예인에 대한 선망이 점점 더 커진다"며 "부모들도 자식들이 스타가 되는 것에 과거보다 상당히 긍정적이다. 청년층이 선택지가 많지 않은 상황인데 연예계를 유력한 출구로 여기면서 (연영과에) 더욱 많이 지망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왜 청년들은 배우가 되려 할까. 전문가들은 한국 콘텐츠 전성기와 더불어 연예인 선망 현상이 심해졌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김세정 기자 |
정덕현 문화평론가도 "영화산업뿐만 아니라 드라마 같은 K 콘텐츠 산업이 많이 성장했다. 예전에는 배우를 지망한다면 부모들이 반대하는 입장이 강했는데 요즘은 자식이 재능이 있다면 밀어준다"며 "(배우가 되는 게) 쉬운 길은 아니지만 다른 길도 쉽지 않고,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설명했다.
1990년대엔 미남·미녀 스타들만 연기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면, 2000년대 들어 탄탄한 연기력만 뒷받침된다면 평범한 마스크의 배우들도 성공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도 경쟁률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예전에는 꽃미남, 꽃미녀만 스타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연기력을 갖춘 한예종 출신이나 조연 배우들이 등장하면서 연기력만 있으면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생겼다. 스마트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도 연기력으로 평가한다. 열심히 활동하면 뜰 수 있으니까 해볼 만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했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