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상업영화 '타겟' 단역 "그래도 감사"
'박봉' 출연료에 주방보조, 상하차 알바
무명 버겁지만 가족에게 베푸는 날까지
무명배우 김원식(36) 씨가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더팩트>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
전세계 한류 열풍에 칸영화제 남녀 주연배우상 수상자까지 배출한 대한민국의 화려한 무대 뒤에는 수많은 '희극지왕'이 있다. 무명의 고단함을 이겨내며 연기의 꿈을 키우는 이들이다. <더팩트>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왜 이처럼 배우의 길은 바늘구멍일 수밖에 없을까. 그 구조적 문제까지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직장인 수현은 돈을 아끼기 위해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세탁기를 구매했다. 웬걸 작동하질 않았다. 사기당한 걸 알게 된 수현은 사이트를 뒤져 직접 범인을 찾아낸다. 범인이 올린 게시글마다 '사기꾼'이라는 댓글을 단다. 그날부터 범인은 수현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중고거래로 범죄 표적이 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타겟'이다.
'타겟'에 나온 배우를 소개하려 한다. 주연배우 신혜선? 김성균? 아니다. 김원식(36)이다. 타겟 속 원식 씨 연기를 감상하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러닝타임 내내 눈을 부릅뜨고 원식 씨를 찾았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카메라로 범죄 현장을 담는 경찰 감식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큰 카메라를 들고 있느라 얼굴이 나오지 않는다. 원식 씨는 무명배우다.
4초가량 등장. 그마저도 자신 외엔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원식 씨에게 '타겟'은 소중한 작품이다. 처음으로 상업영화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영화사에 프로필을 돌린 지 10여 년 만에 첫 연락을 받았다. '감식반원 2' 배역을 따내려 무려 3차의 오디션을 거쳤다.
"20대 중반부터 연극을 하면서 (영화 쪽에도) 프로필을 계속 돌렸는데 2년 전 처음 연락을 받은 거예요. 대면 오디션을 보고 싶다길래 정말 놀랐어요. 오디션장에서 연기를 했는데 전 조금 아쉬웠어요. 그래서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며칠 뒤에 3차를 보러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덜컥 합격했어요. 거짓말인 줄 알았다니까요. 제겐 처음이니까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원식 씨는 영화 '타겟'에 감식반원2 역할로 출연했다. 첫 상업영화다. /김세정 기자 |
설레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다. 위아래 흰색 방호복을 입은 채 마스크를 꼈다. 카메라를 들고 시체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대사를 하는 김성균 배우 뒤를 걸어서 왔다 갔다 한다. 그게 다였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촬영장에서 의상을 입었는데 얼굴이 거의 안 나오겠더라고요. 하하. 저는 제가 어느 장면에서 나오는지 아니까. 영화에서 딱 4, 5초 정도 나왔어요. 원샷이 잡히긴 하는데 제가 사진을 찍어서 플래시가 터지니까 제 모습을 저만 아는 거예요. 그래도 감사했어요. 얼마나 좋아요. 크레딧에 이름이 올라갔으니까요."
올해로 12년차 '무명배우' 원식 씨. 주로 연극무대에 오른다. 시간이 남을 땐 종종 글도 쓴다. 2년 전엔 '잠깐! 방금 나랑 눈 마주친 것 같은데?'라는 에세이집을 내기도 했다. 무명생활을 담백하게 담아낸 원식 씨 블로그글에 이끌려 인터뷰를 제안했고, 9월 어느 날 서울 마포구에서 원식 씨를 만났다.
오랜 무명생활 탓일까. 겸손함이 몸에 배 있는 듯했다. "제 이야기가 별것 없어서, 나중에 기사 쓸 때 고생하시는 거 아닌지…. 제가 재미없는 사람이라서 걱정이 많이 되네요." 맑은 눈을 연신 끔뻑인다.
울산 출신인 원식 씨는 대학 진학을 위해 상경했다. 대학에선 연극을 전공했다./김세정 기자 |
고향은 울산 방어진 바닷가. 어머니와 누나는 장애를 갖고 있다. 빠듯한 살림이었다. 연예인이 되고 싶었지만, 어린 소년은 방법을 몰랐다. 고교 시절 방송반 활동이 조금이나마 갈증을 해소할 창구였다. 그러다 뒤늦게 울산 시내에도 연기학원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저기 다니면 연예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조심스레 학원 이야기를 꺼냈다. 힘든 상황에서도 부모는 아들에게 "열심히 하라"는 응원과 함께 학원비를 마련해줬다. 원식 씨는 수업이 끝나면 혼자 학원에 남아 연습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한참 바라봤다. 대사를 되뇌이며 배우의 꿈을 단단히 키웠다.
고3 시절 거친 경상도 사투리까지 완벽히 고칠 정도로 열정 가득했던 소년은 바다내음을 가슴에 묻어두고 서울행을 택했다. 연극과에 들어갔다. 좋아하는 분야를 전공으로 택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일지도 모른다. 실기는 물론, 학점 욕심도 있어서 이론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재학 중 오디션에 합격해 연극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그 이후는 어떻게 됐냐고 물으신다면. 우리가 흔히 들어오던 '무명배우'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무명배우의 삶은 고달프다. 연기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김세정 기자 |
무명배우의 삶은 고달프다. 연기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는다. 작품마다 다르지만 원식 씨의 경우 연극 회차당 5만원 정도를 받을 때도 있다. 연습 기간 때는 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는 서울에서 생활을 이어갈 수가 없다. 언제 작품에 들어갈지 몰라서 고정 직업을 구하기도 어렵다. 호프집부터 식당 설거지, 주방 보조, 상하차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촬영이 들어오면 빠져야 하니까 고정 아르바이트를 할 수 없거든요. 단기 행사나 상하차 위주로 하고 있어요. 상하차도 꾸준히 하다 보니까 지금은 그렇게 힘든지 모르겠어요. 새벽에 일하고 낮에는 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으니까 잠을 조금 줄여서라도 하는 거죠. 저와 비슷한 위치의 사람들에게 아르바이트는 숙명과도 같아요. 직장인 친구들은 '야 이거 벌고, 어떻게 사냐' 그러는데 축적은 못 해도 좋아하는 일 하면서 모자람 없이 산다고 생각해요. 제가 너무 철없는 소리를 하는 걸까요? 하하."
기자 : 배우님, 나중에 잘 되실 것 같아요.
원식 : 20대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에요. 하하. 그래도 기분 좋은 말이라서 고맙습니다.
기자 : 아, 이런 말도 뭐랄까. 좀 지치는 거죠?
원식 : 지친다기보단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가 더 잘 되려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이 들어요. 프로필을 더 돌려야 하나, 아니면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야 하나 그런 생각도 들고…. 배우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우선순위는 연기겠죠? 묵묵히 제가 좋아하는 연기를 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올 거고, 누군가는 알아주지 않을까 해요.
원식 씨의 꿈은 유명한 배우가 아닌 '행복하게 연기하는 배우'다. /김세정 기자 |
12년 무명생활, 때때론 버겁다. 그래도 괜찮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 남아있다. 엄마와 누나에게 언젠간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
"엄마는 귀가 잘 안 들리고, 누나도 장애가 있어요. 가족 이야기를 하면 딱하게 보는 분들이 대다수예요. 저는 괜찮아요. 나중에 성공하면 엄마랑 누나한테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두 사람한테 항상 애틋한 감정이 있어요. 부담을 전혀 안 주려고 하시는데 전 나중에 돈을 벌면 엄마랑 누나에겐 꼭 베풀고 싶어요."
목표를 묻자 원식 씨는 "엄청 유명한 배우가 아닌, 행복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