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박스 14년째…구구절절 사연 가득
이종락 목사 "생명 지키는 게 유기인가"
주사랑공동체교회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비탈길에 있다. 급격한 경사때문에 자전거를 타고 올라가기 쉽지 않다. /김세정 기자 |
미등록 출생아동이 사회문제화되면서 '베이비박스'도 다시 도마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유기를 부추기는 불법 행위라고 주장하지만 엄마들은 번민 끝에 위험에 처한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 이곳을 찾는다. <더팩트>는 베이비박스의 '산파'인 이종락 목사의 인터뷰와 찬반 논란을 둘러싼 전문가들의 견해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편집자주>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느닷없는 아기 울음소리가 고시원 3층 복도의 적막감을 깼다. 윤희(가명)는 재빨리 핏덩이 입을 손으로 감쌌다. '여기서 울면 안 돼. 제발….' 간절히 빌었지만 손가락 사이로 울음은 계속 새 나왔다. 세상에 나온 걸 알리듯 아기는 조그만 몸으로 우렁차게 울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며 "왜 아기 우는 소리가 여기서 들립니까. 얼른 데리고 나가세요!"라고 말했다. 윤희는 아기를 품에 꼭 안았다. 까만 배냇머리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원치 않던 임신과 출산. 고등학생 윤희에겐 모든 것이 막막했다. 더 이상 사는 게 의미 없겠다는 생각에 아기와 고시원방을 나서던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지금 TV에 나오는데 아기를 받아주는 곳이 있대."
윤희는 그렇게 신림동 비탈길을 오르게 됐다. 임신 소식에 연락을 끊은 아기 아빠를 향한 원망, 그리고 축복받지 못한 아기에 대한 미안함이 뒤섞인 채 '베이비박스' 문을 열었다.
서울 관악구 주사랑공동체교회. 볕이 따가운 날씨에 이곳을 찾아가기란 쉽지 않다. 버스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을 10분 정도 오르면 경사진 대지를 따라 비스듬히 앉은 나무 사이딩 건물이 나온다. 우뚝 솟은 첨탑도, 거대한 십자가도 없는 겸손한 모습의 교회. 윤희처럼 벼랑 끝에 내몰린 수많은 엄마들은 마지막 선택으로 이곳의 위기영아긴급보호센터를 찾는다.
건물 담벼락 계단길 옆에 조그만 상자가 설치돼 있다. "당신이 이 아이의 생명을 지켰습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신중하게 생각해 주세요"라는 문구 아래 손잡이를 당기면 노란 공간이 나온다. 아기를 눕힐 수 있도록 담요가 곱게 깔려 있다. 이종락(69) 주사랑공동체교회 담임목사는 위험에 처한 아기를 살리겠다는 생각에 2009년 베이비박스를 직접 디자인해 만들었다.
베이비박스 내부의 모습. 이불이 깔려 있고 위엔 CCTV가 설치됐다. 박스 문이 열리면 소리가 나오고, 안에 있던 상담사가 곧장 나온다. /김세정 기자 |
14년간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연을 꼽아달라는 물음에 이 목사는 '윤희'를 떠올렸다. 그는 "남자친구한테 임신 이야기를 하니까 연락도 끊고, 잠적했으니 얼마나 억울했겠나. (아기와 극단적 선택을 하려고) 울면서 고시원을 나왔는데 그 순간에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고 했다. 신발도 안 신고 아기를 안고 여길 찾아왔다.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찔하다"고 말했다.
이곳을 찾은 10명 중 8명은 미혼모고, 10명 중 7명은 10~20대다. 성폭행을 당했다거나 화장실에서 출산했다거나 윤희처럼 저마다 사연을 갖고 있다. 베이비박스를 열면 벨이 울리고, 상담사가 곧장 뛰어나와 아기 엄마 손을 붙잡는다. 상담사들은 어린 엄마를 짓누르는 죄책감을 풀어주려 한다. "열 달 동안 아기 품느라 고생했어요. 당신이 아기 생명을 지키고 살린 겁니다. 엄마, 아빠한테 말 못 한 거 다 털어놔도 돼요. 그래야 병이 안 생겨요"라고 위로를 건네면 미혼모들은 꾹 참았던 눈물을 토해낸다.
이 목사는 "처음에는 이야기를 잘 안 하려 한다. 괜찮다고 계속 설득하면 서서히 마음을 털어놓는다"며 "상담실에 베개랑 뿅망치를 가져다 놨는데 어떤 아이는 얼마나 분노스러웠으면 세 시간을 울면서 뿅망치로 베개를 내리치더라. 미혼모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있지 않나. 셀 수 없는 사연이 다 있다"고 설명했다.
베이비박스를 찾은 아기들은 대부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미등록' 상태다. 경찰에 신고된 후 관할구청에 인계돼 아동복지센터로 보내지고, 이후 보육원 등 시설에 간다. 센터는 이 기간 동안 아기를 맡는다. 아기를 기를 형편이 안 될 때도 1~6개월간 위탁해 양육한다. 매년 평균 150~180명의 아기가 이곳에 맡겨진다. 14년간 보호한 아기만 2095명에 달한다.
이종락 목사는 위험에 처한 아기를 살리겠다는 생각에 2009년부터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고 있다. /김세정 기자 |
일각에선 아기를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는 지적도 나오지만, 센터는 이곳을 찾는 엄마들이 양육을 포기하지 않도록 최대한 설득한다. 이 과정에서 다시 아기를 데려가는 경우도 상당수다.
유기를 조장할 수 있다는 우려에 이 목사는 "엄마가 아기를 포기하지 않고 출산까지 했다. 열 달 동안 엄마로서 느낀 모진 아픔과 고통, 눈물이 있다. 고난을 다 거쳐 아기를 살리지 않았나. 밖에 버리지 말고 안전히 여기 갖다 놓으라고 한 것이 어떻게 유기가 될 수 있나"라고 물었다.
사명감으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던 이 목사지만 요즘 고민이 부쩍 늘었다. 출생 미신고 아동에 대한 경찰 수사와 국회를 통과한 '출생통보제' 때문이다. 최근 출생 미신고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경찰은 대대적 수사에 돌입했다. 베이비박스 역시 수사범위에 포함됐다. 현행법상 베이비박스에 아기를 맡기는 것은 유기나 영아유기에 해당할 여지가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달 17일 발표한 미신고 아동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2022년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아동은 2123명이었다. 파악된 사례 중 1095명에 대해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는데 이중 베이비박스 등 유기가 601명(54.9%)으로 절반이 넘었다.
이 목사는 최근 경찰 수사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무 데나 아기를 버리는 것이 유기지, 여기 맡기는 것은 유기가 아니다. 귀한 생명이 희생되지 않도록 보호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반박했다. 이 목사에 따르면 학생 때 아기를 베이비박스에 맡긴 뒤 새로운 인생을 찾은 여성이 최근 경찰의 연락을 받게 되면서 가정 파탄에 이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베이비박스 수사가 엄격하다는 비판이 나오자 경찰도 부모가 상담을 거친 사실이 확인되면 입건하지 않기로 했다. 이 목사는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무조건 이렇게 (수사를) 한다는 것이 산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베이비박스를 찾은 10명 중 8명은 미혼모고, 10명 중 7명은 10~20대다. /김세정 기자 |
시행을 앞둔 출생통보제도 이 목사의 근심을 더한다. 앞으로는 의료기관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출생정보를 제공하면 심평원은 시·읍·면 장에게 통보해야 한다. 시·읍·면 장은 1개월 내 출생신고가 되지 않을 경우 직권으로 신고할 수 있다. 국가가 나서 출생신고 누락을 막겠다는 것이다. 그는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는 산모들은 병원에 못 간다. 병원 밖 출산을 하게 된다. 불법조산소가 생기는 등 더 위험한 상황이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임산부가 익명으로도 아이를 출산할 수 있는 보호출산제가 함께 도입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만 보호출산제는 양육 포기를 부추기고 친부모에 대한 알권리를 침해할 수 있어 신중론도 만만치 않다. 이 목사는 "학생이라서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면 익명으로 출산하게 하는 것이다. 출생신고 기록은 아동권리보장원에 보호되고, 나중에 아기가 자라서 엄마를 만나고 싶으면 가정법원에 신청하고 합의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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