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영화 상영하는 실버영화관…하루 500여 명 방문
지원 끊겨 재정난…전문가들 "노인 문화생활 지원해야"
23일 오후 1시 실버영화관에 방문한 한 노인이 상영 프로그램을 살펴보고 있다. /조소현 기자 |
[더팩트ㅣ조소현 기자] '하루 한 잔의 위스키와 한 모금의 담배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친구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 '미소'처럼 하루 한 잔의 커피와 한 편의 영화 그리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만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서울시 종로구 낙원악기상가 4층 '실버영화관'에 모인 7080 세대들의 이야기다.
◆ 노인을 위한 영화관은 있다…'향수 자극' 영화, 저렴한 티켓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지나간 지난달 23일 오후 1시. 실버영화관은 고전영화를 보기 위한 7080세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강영국(81) 씨는 '서부극의 전설' 존 웨인이 출연한 '3인의 신부'를 관람한 후 기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섰다. '3인의 신부'는 1948년 작으로, 3인의 무법자가 도주하던 중 죽어가는 여인과 그녀의 아기를 발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강씨는 "봤던 영화지만 재밌다"며 "나이가 들면 새로운 영화보다는 추억을 생각나게 하는 영화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노인들은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아닌 실버영화관을 주로 찾는다.
실버영화관은 지난 2009년 1월 허리우드 극장에 문을 열었다. 어르신을 위한 문화공간을 마련하자는 취지다. 만 57세 이상의 티켓값은 2000원이다. 학생은 5000원, 일반 성인은 7000원이다. 방문객 대다수는 60대 이상이다.
일주일에 세 번 영화관을 찾는다는 윤모(63) 씨는 "(일반)영화관은 (티켓값이) 비싸고, 최신 영화는 취향에 안 맞는 것 같아 (실버영화관을) 찾는다"며 "비슷한 연령대끼리 있으니 편하다. 영화를 보고 싶을 땐 영화를 보고, 수다도 떨 수 있다"고 말했다.
아내와 함께 방문한 70대 김모 씨도 "가격이 저렴하고 문화생활도 즐길 수 있다"며 "눈 뜨면 갈 공간이 있다는 게 좋다"고 했다.
김은주 실버영화관 대표는 "어르신들이 젊었던 시절에는 국가와 직장,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라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며 "어르신들께 그때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소현 기자 |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모이는 시간은 오후 2시30분이다. 오후 2시가 되자 두 명의 직원만 근무하는 매표소 앞으로 노인 열댓명이 줄서기 시작했다. 저마다 1000원짜리 두 장을 손에 꼭 쥐고 차례를 기다린다.
대면결제만 가능한 시스템. 부담스러운 키오스크는 없다.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낄 법하지만 이들에게는 오히려 자유롭다.
기계 사용법을 몰라서 난처하지도, 시간이 지연돼 뒷사람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원하는 시간대를 말하면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다.
서울 마포구에서 왔다는 70대 이모 씨는 "기계(키오스크)가 없는 게 좋다"며 "우리는 옛날에 갖고 있는 상식을 바탕으로 살기 때문에 새로운 아이템에 익숙하지 않다. 컴퓨터도 제대로 못 하는데 요즘은 다 기계로 돼 있어 불편했다"고 털어놨다.
이 씨와 함께 온 70대 박모 씨도 "영화를 좋아하는데, (영화관에) 기계가 늘어 힘들었다"며 "자꾸 (키오스크 사용법을) 배우라고 하는데, 우리는 창의적인 목표를 갖고 여생을 살려는 게 아니다. 좋아하는 걸 바탕으로 여생을 관리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했다.
◆정부·지자체 지원금 줄어 대표 사비 털어 운영
김은주 실버영화관 대표는 노인들의 놀이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영화관을 열었다. 김 대표는 "어르신들이 젊었던 시절에는 국가와 직장, 가족을 위해 희생하느라 영화 한 편을 제대로 볼 여유가 없었다"며 "어르신들께 그때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티켓값을 저렴하게 한 것도 부담 없이 방문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실버영화관의 재정 상황이 녹록지 않아 언제까지 운영할지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2000원에 불과한 티켓값으로는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없고 지난 2019년 이후 정부와 지자체의 지원도 줄었다. 김 대표가 사비를 털어 운영하는 형편이다.
전문가들도 노인 문화생활에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어르신들이 갈 수 있는 공간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탑골공원을 중심으로 모이고 있다"며 "종로가 교통이 좋아서 어르신들 문화가 형성됐다. 하지만 원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 인천에서 종로까지 올 수 없다. 동네에서도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아날로그 공간을 남겨두는 것은 좋다"면서도 "노인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데 집중하면 디지털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 영화관에 구비된 키오스크에 목소리를 이용해 주문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유니버설 구조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sohyun@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