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제살인' 비극 되풀이 언제까지…"입법 공백 해결해야"
입력: 2023.06.02 00:00 / 수정: 2023.06.02 00:00

'금천 연인 살해' 교제폭력 신고에도 풀어줘
'위험성 체크리스트' 보완했지만 무용론 여전
가정폭력방지법 개정안 국회서 표류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에서 30대 남성 김모 씨가 동거하던 여성 A씨를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김 씨. /뉴시스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에서 30대 남성 김모 씨가 동거하던 여성 A씨를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진은 김 씨. /뉴시스

[더팩트ㅣ조소현 기자] 서울 금천구에서 여성이 또다시 살해당했다. 피해자는 살해당하기 직전 교제폭력(데이트폭력)으로 신고했지만 이번에도 희생을 막지 못했다. 입법공백을 해결하지 못하면 참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26일 서울 금천구에서 30대 남성 김모 씨가 교제 중이던 여성 A씨를 상가 지하주차장에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오전 7시17분쯤 살해당했는데 사건 발생 약 1시간30분 전인 오전 5시36분쯤 김씨를 재물손괴와 폭행 등으로 112에 신고했다.

A씨는 경찰에 '김씨가 찾아와 TV를 부수고 팔을 잡아당겼다'고 진술했다. 폐쇄회로(CC)TV 영상 등을 보면 김씨는 거리에서 A씨의 팔을 여러 차례 잡아당기며 골목으로 끌고 가려 한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두 사람을 지구대로 임의동행해 조사했다.

김씨는 조사한 지 한 시간도 안 돼 풀려났다. 경찰은 오전 6시11분쯤 김씨를 귀가 조처했고 김씨는 A씨의 집으로 향했다. 이후 흉기를 챙겨 금천구 시흥동의 한 PC방 인근에서 A씨를 기다렸다. A씨는 오전 7시7분쯤 조사를 마친 뒤 경찰서를 나섰고, 김씨는 오전 7시17분 A씨를 살해했다. 자신을 신고해서 기분이 나빴다는 게 범행동기였다.

◆범인 걸러내기 어려운 '체크리스트'

범죄 징후는 뚜렷했다. 경찰은 왜 김씨를 풀어줬을까. '범죄 피해자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를 통해 조사한 결과 경찰은 김씨의 범행 가능성이 작다고 봤다.

경찰은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보복당할 우려가 있으면 이 체크리스트를 통해 위험성을 판단한다. 피해자는 28개 문항에 답하고, 경찰은 이를 토대로 '매우 높음, 높음, 보통, 낮음, 없음' 중 범죄 가능성을 평가한다. 위험도가 '높음' 이상일 경우 경찰은 가해자 체포와 구속, 유치장 유치 신청 등 조처를 한다.

'신당역 살인 사건' 때도 경찰은 가해자 전주환의 범죄 위험성을 '없음 또는 낮음'으로 봤다. 이에 체크리스트 '무용론'이 불거졌고, 경찰청은 체크리스트를 개선했다. 새 체크리스트는 문항 수가 16개에서 28개로 늘었고 가정폭력과 스토킹, 교제폭력 등 '관계성 범죄'와 관련한 항목도 추가됐다. 이번에 사용된 체크리스트는 보완된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체크리스트가 피해자 진술에만 의존하도록 설계돼 가해자의 폭력 위험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평가 항목을 늘려도 가까운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제폭력 사건 특성상 가해자의 폭력 위험이 과소평가될 수밖에 없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관계성 범죄) 피해자는 (가해자와의) 인간적인 관계, 보복의 두려움 등으로 객관적인 진술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건수 백석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관계성 범죄) 피해자는 가해자의 죄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에 흔들려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잦다"며 "담당 경찰관이 위험성을 주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당역 살인 사건 때도 경찰은 가해자 전주환의 범죄 위험성을 없음 또는 낮음으로 봤다. /이동률 기자
'신당역 살인 사건' 때도 경찰은 가해자 전주환의 범죄 위험성을 '없음 또는 낮음'으로 봤다. /이동률 기자

◆처벌 불원시 추가 대응 한계…개정안은 국회 계류 중

다만 교제폭력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경찰이 개입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번 사건에서 A씨도 김씨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윤호 교수는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법 집행을 할 경우 직권남용 등으로 (경찰 개인이) 소송에 책임져야 하므로 경찰은 최소한의 법 집행을 하려는 경향이 있다"며 "(교제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반의사불벌죄를 폐지하는 등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아도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현재로서는 적극적으로 보호조치를 할 수 없는 구조"라며 "경찰이 현장 상황, 가족 증언, 가해자의 평소 행동 등을 비춰볼 때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경찰의 재량권을 강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스템이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교제폭력은 가정폭력과 스토킹 범죄 등과 달리 가해자에 대해 접근금지 조치를 할 법적 근거도 없다. 곽 교수는 "교제폭력은 접근금지 조처를 할 수 없다"며 "가정폭력과 스토킹 범죄처럼 접근금지 조치가 가능하도록 법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회에는 교제폭력과 관련된 법안이 상당수 발의돼 있다. 지난 2021년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가정폭력방지법 일부 개정안'이 대표적이다. 해당 개정안은 피의자 격리, 접근 금지 명령 등 보호조치가 가능한 가정폭력처벌법 대상에 교제관계를 포함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교제관계'를 정의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입법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교제관계를 정의할 수 없기 때문에 죄형법정주의에 반한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가정폭력방지법은 가정폭력을 강하게 처벌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이 아닌, 관계성 범죄에 국가가 개입해 가해자를 '보호처분'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며 "보호처분은 형벌이 아닌데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의 원칙에 반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가해자를 중심으로 피해자와 어떻게 분리시킬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sohyun@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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