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자 부모가 전하는 메시지
학폭 의심스러우면 자기 판단 믿어야
상처 치유해줄 수 있는 주체도 부모
임 씨가 아들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슬픔은 당연하게도 가시질 않는다. /임지영 씨 제공 |
"폭력의 순간에는 인간의 존엄, 명예, 영광 같은 걸 잃게 된다. 피해자들이 '원점이 되는 상태'를 응원한다".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제목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현실에서는 피해자들이 '원점'이 될 수 있을까.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드라마'와 현실은 얼마나 부합할까. <더팩트>가 여전히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수많은 '문동은'들의 상처를 들여다봤다.<편집자주>
[더팩트ㅣ조소현 인턴기자]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사건을 해결해 가면서 사실이라는 걸 실감했어요. '승민이 사건을 해결하고 나도 따라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피해 학생 어머니 임지영 씨)
"CCTV 속에서 아들이 구타를 당하는데, 옆에선 학생들이 춤을 추더라고요. 솔직히 말해 '보복만이 답이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엉덩이 한 번 때리지 않고 키웠는데…" (이해준 학교폭력연구소장)
학교폭력 피해는 자녀의 삶뿐 아니라 부모의 삶까지 송두리째 앗아갔다. 부모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애지중지 키운 자녀였다. 부모는 분명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자녀의 학폭 피해로 고통받는 부모들이 많다. 먼저 악몽을 이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누구도 믿지 마세요. 자신을 믿으세요"
지난 2011년 학교폭력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권승민(당시 14세) 군의 어머니 임지영(60) 씨는 <더팩트>와 인터뷰에서 "아이가 그렇게 힘들었는데 엄마가 돼서 몰랐다는 사실과 막지 못했다는 것이 죽을 만큼 힘들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산다"고 털어놨다.
임 씨의 기억 속에 자신은 아들을 지키지 못한 '죄인'이었다.
임 씨가 아들을 떠나보낸 지 어느덧 11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슬픔은 당연하게도 가시질 않는다.
"처음에는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어요.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며 일상생활을 하고 있죠. 슬픔이란 게 사라지는 게 아니고 익숙해져서 지금은 그 속에서 사는 법을 터득해서 지내요."
교사인 임 씨는 지난 2011년 12월 20일 여느 때처럼 학교로 출근했다. 시험 준비로 바쁠 때 아들이 등교하지 않았다는 선생님의 연락을 받았다. 경찰에게도 전화가 왔다. 그 뒤로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아들의 죽음 앞에 가장 후회되는 점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사건 전 아들은 임 씨에게 돈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졌다. 안 하던 게임도 했고 집에 친구들을 데려오는 날도 많았다. 이상했던 점은 친구들이 다녀간 날에는 냉장고가 텅텅 비었다는 것이다. 사라진 부식 거리와 간식거리들은 10인분 정도의 양이었다.
"여러 징조가 있었어요. 평소답지 않다고 생각해 승민이에게 물어보고 담임 선생님께도 상담을 요청했죠. 그런데 아들도 아무 일 아니라고 하고 선생님께서도 큰일 아닌 것 같다고 하니 믿었습니다. 누구도 믿지 마세요. 자기 판단을 믿으세요."
임 씨는 "과거로 돌아간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아들을 살리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폭력 피해자 부모이자 책 '아빠가 되어줄게'를 집필한 이해준 학교폭력연구소장은 객관적인 상황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해준 소장 제공 |
◆"부모의 듬직한 모습에 아이들도 용기"
학교폭력 피해자 부모이자 책 '아빠가 되어줄게'를 집필한 이해준 학교폭력연구소장은 단호했다. 머릿속에는 자녀의 피해 사실을 안 후부터 회복 단계까지 매뉴얼이 정확했다. 그가 지난 2021년 4월부터 학교폭력연구소를 운영하며 무료로 상담을 진행하는 이유다.
이 소장도 처음부터 이성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20년 5월 중학교 2학년 아들이 선배들에게 폭행당했다는 사실을 안 후에는 '패닉 상태'였다. 그러나 금세 냉정해졌다. 고통받는 모습을 보이면 아들이 되레 죄책감을 가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아들이 보는 데서 울지 말라고 했어요. 씩씩하게 행동해야 '엄마, 아빠가 나를 위해 노력하는구나'라고 인식할 거라고.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얘기해주는 게 아이 입장에서는 안심도 되고 든든할 수 있거든요. 부모들이 우울해하거나 법적 해결에만 집중해 아이들의 심리를 외면하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이 소장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아들의 피해 사실을 직접 입증했다. 소년 재판부터 민사소송까지 해냈다. 부모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아들에게는 더 좋은 영향을 줄 거로 생각했다.
"증거가 있어야 해요. 메시지, SNS 등을 캡처해놓고 피해 발생 시점이나 관련자들을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하고요. 자녀가 (피해 사실을) 알리기 싫어해도 부모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해요."
이 소장은 객관적인 상황 인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현재의 '학교폭력위원회' 시스템하에서는 피해 사실을 인정받지 못하거나 피해자도 가해자가 되는 일이 잦아 오히려 아이들의 상처가 깊어질 수 있기 때문에 치밀해야 한다는 것이다. 폭력의 유형을 구분해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해결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도 전했다.
◆반복되는 학교폭력…"처벌보다 중요한 건 회복"
다행히 이 소장의 아들은 상처를 빨리 극복했다. 이 소장은 그 이유를 '부모와의 연대감'에서 찾았다.
"평소 아들과 소통이 활발한 편이었어요. 사건이 발생한 뒤에는 여행도 자주 다니고 대화도 더 많이 했죠. 즐겁게 얘기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다 보니 회복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학교폭력에서 자녀를 지킬 수 있는 주체도,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는 주체도 결국은 부모라고 생각합니다."
피해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건 임 씨도 마찬가지였다.
"피해자 회복을 위한 '해맑음센터'(사단법인)가 다 망가져 가도 (정부는) 투자해주지 않아요. 처벌은 반드시 해야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손상된 피해자의 인권을 온전히 회복시켜주는 거예요. 피해자들이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치유해 학교로 복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임 씨와 이 소장 모두 정책·제도 개선과 더불어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내 아이를 가해 학생으로 키우지 않는 것,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아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보듬어주는 것 모두 부모의 역할이었다.
sohyun@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