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 요구에 회계 자료 제출 37%
회계자료 요구할 수 있는지 공방
지원금 등 혜택 철회 vs 공동 투쟁
고용노동부는 조합원 1000명 이상인 노조 327곳에 회계장부 비치 의무를 준수했는지 확인 가능한 서류를 지난 15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요건에 맞게 낸 노조는 120곳(37%)에 그쳤다. /세종=임영무 기자 |
[더팩트ㅣ주현웅 기자] 정부가 노조에 회계장부 공개를 압박하며 노정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정부는 일반회계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노동단체에는 예산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또 올해 노조 지원 국고 예산(44억 원)의 절반을 근로자협의체와 MZ노조 등 신규 기관에 배정하기로 했다.
갑작스런 조치에 일각에서는 '노조 때리기'를 의심하기도 한다. 노조 회계를 정부가 열람할 권한이 있는지를 놓고도 논란이 뜨겁다.
◆정부 지원금은 공개…'조합비' 어떻게
이번 사태로 노동계는 돈 문제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맞은 2005년의 악몽을 떠올리기도 한다.
당시 민주노총 강승규 수석부위원장은 택시운송조합에서 수천만 원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한국노총 권오만 사무총장 등은 청탁성 돈을 받은 등의 혐의로 긴급체포됐다. 이후 두 사람은 각각 징역 1년,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았다.
양대노총은 이 사태를 계기로 구조적 혁신을 시도했다. 회계 투명성 제고를 위해 회계감사를 선임하고, 대의원대회 등에서 예·결산 자료를 공개하는 등의 방안을 마련했다. 국고보조금은 외부 공인회계사들이 감사를 벌여 결과를 노동부에 제출하도록 했다.
다만 이번 사태에서는 '조합비'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합원들이 자체적으로 조성한 재정까지 정부가 관리·감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상진 민주노총 대변인은 "일반회계인 조합비의 운용 현황은 조합원 누구나 열람을 요청할 수 있고, 민주노총과 산하 노조는 충실히 공개하고 있다"며 "현재 정부의 조치는 노조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한국노총도 성명서를 내고 "자체 조합비도 철저하게 관리 운영되고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노조 내부에서 알아서 할 사항"이라며 "정부의 관리 감독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노동계는 투쟁을 예고해 노정의 강대강 대치가 예상된다. 사진은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과 김동명 한국노동 위원장이 지난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앞에서 '윤석열 정부 노동개악 반대, 노동-민생입법 처리 촉구' 양대노총 위원장 기자회견 기자회견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는 모습. /임영무 기자 |
◆노조 압박, '적법성' 의심…투명성 제고는 필요
노동부는 '행정관청이 요구하면 결산결과와 운영상황을 보고해야 한다'는 노조법 27조 등을 내세운다. 단 노조에 회계자료를 요구하는 일은 매우 드물어 유명무실한 법으로 인식돼온 것도 사실이다. 국제노동기구(ILO)가 정상·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노조의 자유로운 자금 관리·사용을 강조하는 영향도 있었다.
정부의 노조 압박 조치로 보는 시각도 나온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었던 시절부터 노조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대표적 조치들이 회계감사 등으로 통제하려던 것"이라며 "그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부 조치의 적법성 자체도 논란이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의에 "재정에 관한 장부와 서류가 (정부가 제출을 요구할 수 있는) 노조법 27조의 ‘결산 결과와 운영상황’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회신했다.
물론 한국 노조의 회계 투명성이 해외보다 떨어진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국내 노조법은 회계감사원의 자격을 정해두지 않아 전문성과 독립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약점이 있다. 영국과 일본은 회계감사원의 자격을 규정했다.
미국은 '그리핀법'(Landrum-Griffin)을 통해 노조의 회계 공개를 강제했다. 노조 임원의 재산도 공개하며, 특히 재정운영과 관련한 재무·회계 보고서를 구체적으로 작성해 행정관청에 내야 한다.
독일에서는 노조 재정운영에 관한 사항으로 감사위원회 또는 감독위원회를 독립적으로 조직해야 한다. 활동과 권한 등도 상세하게 규율한 편이다.
노동부는 지난 23일 ‘노동단체 지원사업 개편 방안’을 공개했다. 회계를 공개하지 않는 노동단체에 예산 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최근에는 조합원 1000명 이상인 노조 327곳에 회계장부 비치 의무를 준수했는지 확인 가능한 서류를 제출받았다. 요건에 맞게 낸 노조는 120곳(37%)에 그쳤다. ‘서류 미제출’로 분류된 207곳이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노동계는 일찌감치 투쟁을 예고해 노정의 강대강 대치가 예상된다. 양대노총은 지난 20일 나란히 입장문을 내고 "세액 공제와 보조금·지원금 중단 등 돈을 가지고 겁박하는 정도에 이르렀다"며 "노동부 장관에 직권남용 책임을 묻고, ILO에 공식 제소하는 등 공동 투쟁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chesco12@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