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집무실은 '용산'에 없다…이름 빼앗긴 '둔지산'의 아픔
입력: 2022.05.29 00:00 / 수정: 2022.05.29 00:00

국방부 일대는 진짜 이름은 '둔지산'…일본군 주둔하며 없애

용산구와 마포구와 경계선상에 있는 용산(龍山). 빼곡한 아파트 사이 정상 부근에 용산성당이 있다./김이현 기자
용산구와 마포구와 경계선상에 있는 '용산(龍山)'. 빼곡한 아파트 사이 정상 부근에 용산성당이 있다./김이현 기자

[더팩트ㅣ김이현 기자] 서울 지하철 공덕역을 빠져나와 용마루고개를 오르다 보면 야트막한 봉우리를 만난다. 주변엔 아파트가 빼곡하지만, 엄연한 산(해발 77m)인 만큼 남쪽으로 탁 트여있다. 이 터가 역사에 나오는 '용산(龍山)'의 모습이다. 정상 부근엔 용산성당이 자리 잡고 있다.

동행한 용산 향토사학자 김천수 용산학연구센터장의 설명이다.

"만리재고개를 타고 효창공원, 용산성당, 한강변까지 이어지는 긴 산줄기 전체가 용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용산이라 불렸죠."

실제 용산은 용산구와 마포구와 경계선상에 위치한다. 대동여지도의 부속 '경조오부도', 서적 〈용산구지〉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들어선 국방부 일대에는 용산이 아닌 '둔지산(屯之山)'이 있다. 고유어로는 둔지미로 불렸는데, 조선시대의 용산과 둔지산은 지리적·행정적으로 완전히 별개 지역이었다. 둔지산 일대와 용산은 직선거리로 3km가량 떨어져 있다. 110여 년 동안 '금단의 땅'이었던 용산 미군기지 내에 정작 용산은 없었던 것이다.

◆ 일본군 주둔지 조성 후 '둔지산' 이름 사라져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 이듬해인 1906년부터 둔지산 일대에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1906년 제작된 '한국 용산 군용수용지 명세도'를 보면, 둔지미로 표기된 이태원과 둔지산, 서빙고 일대를 강제수용하면서 지도 명칭을 '용산'으로 바꿨다.

1908년 일본인이 제작한 '경성 용산 시가도'와 1909년 '경성 용산 시가전도' 역시 이 일대를 둔지산이 아닌 용산으로 표기했다. 1910년 국권침탈 이후 둔지산(둔지미)라는 지명은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다. 대신 둔지미 일대를 군사·철도 기지화하면서 '신용산'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 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 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1760년 <한양도>. 노란색 굵은 점선은 당시 둔지방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용산기지 터에 해당한다. 만초천 왼쪽으로 용산이 속한 용산방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1760년 <한양도>. 노란색 굵은 점선은 당시 둔지방의 행정구역으로, 현재의 용산기지 터에 해당한다. 만초천 왼쪽으로 용산이 속한 '용산방'이 있다./서울역사박물관

둔지산과 둔지미 마을이 소거되자, 인근 주민들도 쫓겨났다. 김천수 센터장은 "당시 마을에는 기와집과 초가집을 합해 총 1만4111가구의 가옥과 10만7428평의 전답이 있었고, 기지 조성을 위해 파헤쳐진 무덤만 12만8970기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해산 종용에 격분한 주민들이 청사에 돌을 던지자 일본 헌병이 주모자들을 폭행·체포하고 강제 진압했다. 급기야 이 과정에서 주민 2명이 사망하고, 수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1905년 8월 11일자 대한매일신보)

해방 이후 용산기지에는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걸렸다. 미 7사단이 1945년 9월 용산기지에서 일본군을 몰아내면서 국군이 잠시 용산기지의 주인이됐다. 이내 6·25전쟁 발발로 미8군사령부가 들어와 주둔했다. 미군이 남은 일본군 시설물 대부분을 70년 넘게 사용하며 굴곡진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 향후 용산공원 '어떻게 역사화할지'가 관건

시민단체와 학회는 용산과 둔지산이 제 이름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부는 오는 6월 용산 미군기지를 완전히 반환받고, 시민공원을 조성해 개방할 예정이다. 국토교통부가 준비 중인 최초의 국가공원(용산공원) 조성 계획과도 맞물린다. 이때 '공원 역사화'의 첫 방향으로 지명부터 바로잡자는 게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한국땅이름학회 등의 주장이다.

그러면서 '만초천(蔓草川, 넝쿨내)'을 예로 든다. 둔지미 마을 주민들의 젖줄이었던 만초천은 인왕산 기슭에서 청파를 지나 원효대교 북단으로 흘러들어간다. 지금도 용산 미군기지 내에 복개되지 않은 만초천 지류가 흐른다. 일제는 만초천을 '욱천(旭川)'으로 개명했다. 일본 전범기인 욱일기의 '욱(旭)'자와 같은 한자다.

용산 문배동 인근 만초천 본류 미복개 구간. 위에 보이는 도로는 욱천고가차도다./김이현 기자
용산 문배동 인근 만초천 본류 미복개 구간. 위에 보이는 도로는 '욱천고가차도'다./김이현 기자

정부가 1995년 8월 '욱천'을 '만초천'으로 다시 변경했어도 곳곳에 일본식 지명이 남아있다. 서울시는 2013년 원효대교 북단 부근 다리의 이름을 '욱천교'로 지었다가 최근 만초천교로 바꿨다. 심지어 용산구 문배동 인근에는 만초천 본류가 흐르는데, 그 공간 위 도로 이름은 '욱천고가차도'다.

100여 년 동안 관성화됐기 때문에 옛 이름에 큰 관심을 갖기 어려운 것 또한 현실이다. 하지만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잘못됐다면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크다.

김천수 센터장은 거듭 강조한다.

"역사 연구를 하면서 세 번의 전환기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는 동아시아의 분수령이었던 러일전쟁, 두 번째는 6·25전쟁으로 미군기지화된 용산이죠. 세 번째는 2022년 대통령 집무실 이전입니다. 미래 역사가들은 집무실 이전 또한 역사적으로 분석할 겁니다. 지금이라도 용산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되짚어봐야 합니다."

spe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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