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길따라 만든 서소문아파트…세월따라 사라진다
입력: 2021.08.08 00:00 / 수정: 2021.08.09 08:25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아파트가 50년 만에 철거될 예정이다. /정용석 기자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서소문아파트가 50년 만에 철거될 예정이다. /정용석 기자

"낡았지만 의미있는데"…인근 고밀개발로 철거 예정

[더팩트 | 정용석 기자] "복개천 위에 지어 가지고 재건축도 못 하고 그냥 이렇게 있다가 수명 다하면 없어지는 거야. 터를 잘못 잡았어. 그것도 나랑 같아."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 동훈의 말처럼 50년 서울의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서소문아파트가 철거될 운명에 처했다.

지난 5일 저녁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215번지 서소문아파트. 영화 '멋진하루', 드라마 '나의아저씨' 촬영지로도 유명한 이곳은 아파트의 독특한 구조에 매료된 건축과 학생들, 사진기자 등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50년 역사를 간직한 이곳의 기억을 되새기는 모습이었다.

정부는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의 경찰청 뒤편을 고밀 개발하기로 했다. 지난 3일 국토교통부가 도심 공공복합사업 후보지로 서소문아파트를 포함한 미근동 일대를 선정하면서 아파트는 철거되고 진입도로나 공원이 들어설 예정이다.

◆서울 근현대 역사 품은 최초 선형식 아파트

이 아파트는 만초천이라는 하천에 지어져 물길의 휜 모양을 그대로 닮았다. 국내 최초의 선형식 아파트로, 아파트 아래에는 지금도 하천이 흐른다.

이런 구조 때문에 건물 끝에서 다른 쪽 끝을 바라보면 아파트 전면을 모두 볼 수 있다. 좁고 긴 형태의 아파트 1층에는 상가들이 자리해 있고 2층부터 7층까지는 주거공간이다. 주민들이 아파트 입구에서 나오면 양 옆으로 상점, 바로 앞에 도로를 마주하게 되는 독특한 구조다.

1972년에 준공된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인 이곳에는 50년 세월의 흔적도 곳곳에 남아있다. 외벽은 페인트를 덧칠을 많이 해 칠이 벗겨졌고 건물 내부로 들어서자 계단 난간도 낡아 지지대가 부러진 곳도 종종 보였다. 건물 화장실 앞에는 "화장실용 휴지를 막히지 않도록 많은 양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주민들이 오래된 현관문을 바꿔 달면서 집집마다 문 색깔이 달라졌다.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 재임기간이었던 2013년에는 아파트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해 보존하는 방안도 추진됐었다. 다만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진 못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박원순 시장 시절에 미래유산으로 지정을 추진했었던 적이 있지만 아직 서울시 내 미래유산으로 지정된 아파트는 없다"며 "결국 미래유산 지정은 소유자와 협의가 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날 이곳을 찾은 한 시민은 "낡았지만 의미가 있다"며 "서울사람들이 근현대를 살아오면서 함께 만들어온 공통의 기억이 녹아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서소문아파트 내부 벽면의 페인트 칠이 벗겨진 모습. /정용석 기자
서소문아파트 내부 벽면의 페인트 칠이 벗겨진 모습. /정용석 기자

◆임차인이 80%…서울의 마지막 보금자리

이곳에는 주택 108세대, 상가 21세대가 어울려 있다. 실거주하는 집주인은 20%가 채 되지 않고, 특히 월세로 거주하는 임차인이 절반을 넘는다고 한다.

최순찬 서소문아파트 관리소장은 "여기 집주인이 거주하는 호수가 20%가 안된다"며 "집 세 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좋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이곳 전세값이랑 월세로 서울에서 살 수가 없다. 여기를 허물고 공원을 만든다는데 집주인만 다른 아파트에 임차권을 준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재개발 소식이 발표되자 벌써부터 서소문아파트를 포함해 인근 주택의 가격도 치솟고 있다. 서소문아파트의 크기는 대부분 39~40㎡이며 임대료는 보증금 4000만 원, 월세 50만 원 혹은 전세 1억3000만 원이다. 서울에서 손꼽히게 낮은 수준이기 때문에 이곳이 철거되면 임차인들은 당장 갈 곳을 찾기 쉽지 않다.

인근 공인중개사사무소에서는 "최근까지 서소문아파트 매물이 2억 원에서 2억 원 초반 사이로 올라왔는데 이제는 4억, 5억을 줘도 판다는 사람이 없다"며 "지금 임대료로는 아파트는 어렵고 신림 부근 원룸을 알아보셔야 한다"고 말했다.

내부에서 바라본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 자리한 충정아파트. /뉴시스
내부에서 바라본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 자리한 충정아파트. /뉴시스

◆건축사적 가치 큰 서소문아파트 이웃들

서소문아파트 인근에는 건축사적으로 의미있는 근현대 아파트가 더 있다.

충정아파트는 1932년 준공돼 89년 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본인 건축가 도요타 다네오가 지은 건물로, 건축가 이름을 따 도요타 아파트, 혹은 한자 음대로 풍전아파트로 불렸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유엔(UN)군의 임시숙소로 쓰였고, 이후 호텔로도 이용됐다. 현재는 서민아파트로 남아 시민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1979년 도시환경 정비구역으로 최초 지정되고 2008년에는 마포5구역 2지구로 변경 고시됐지만 현재까지 그 형태를 잃지 않고 자리하고 있다. 서울시는 2019년 충정아파트를 보존하는 방향으로 정비계획을 변경했다. 근대 건축물의 중요 유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서소문아파트에서 경의선 철길을 건너가면 나타나는 중림동 성요셉 아파트는 1971년 건립됐다. 서소문아파트와 같은 선형식이자 국내 최초 주상복합아파트다. 애초 약현성당이 발주해 세워졌는데 이 성당 역시 국내 최초 서양식 성당 건물로 건축사적 가치가 크다.

yong@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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