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유해를 실은 운구 행렬이 19일 오전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광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동률 기자 |
대학로 노제 후 서울광장서 영결식
[더팩트ㅣ김세정 기자]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19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엄수됐다. 유족과 추모객 수백 명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백 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이날 오전 7시께부터 백 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조문객들로 가득 찼다. 조문객들은 모두 '남김없이'라고 적힌 근조 리본을 가슴에 달았다. 문정현 신부와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 각계 인사도 자리를 지켰다.
오전 8시경 발인이 시작되자 장례식장에서는 울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 백일 울산과학대 교수는 오열하기도 했다. LG트윈타워 노동자와 코레일 네트웍스 철도 비정규직 노동자 등 8명이 백 소장을 운구했다.
추위에도 장례식장 앞에는 백 소장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시민과 노동계 인사들이 1백여 명이 모였다. 오전 8시20분께 운구차가 지상으로 올라오자 추모객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놓아 불렀다.
장례식장 정문을 나온 운구차는 백 소장이 설립한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로 향했다. 풍물단이 운구행렬을 이끌었다. 연구소를 거친 운구행렬은 천천히 노제 장소에 도착했다. 백 소장이 평소 자주 가던 학림다방도 들렀다. 300명 안팎이 참석한 노제는 오전 9시55분께 끝났다.
운구행렬은 이화사거리와 종로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영결식이 열리는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일정 간격을 두고 의자가 배치됐다. 영결식에는 1천명 가량의 추모객이 모여들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심상정 정의당 의원 등 정치권 인사도 참석했다.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출발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행렬이 노제가 열리는 대학로로 이동하고 있다. /이동률 지가 |
고인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는 "백 선생님 옆자리가 곧 제자리인줄 알고 살았다. 이렇게 가시면 집회에 나가서 어디에 앉을까. 제 자리가 없어진 것만 같다"며 "죽을 만큼 고문 당해도 초지일관으로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한다. 독재자들에게 내린 칼날같은 말씀은 길이 남을 것"이라고 했다.
양경숙 민주노총 위원장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고 민중 한사람으로서 투쟁해온 선생님의 삶을 오롯이 기억하겠다"며 "마지막 순간까지 노동자와 민중의 삶을 걱정해주신 선생님의 삶에 부끄럽지 않은 민주노총이 되겠다. 어떤 탄압도 두려워하지 않고 투쟁의 맨 앞자리에 서겠다"고 했다.
이어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단상에 올랐다. 김 이사장은 "백 선생님께서 걸음걸이도 힘든 상태에서 부축을 받으며 빈소 안으로 들어오셔서 손자뻘인 용균이에게 큰절로 두번 절하는 모습을 보고 참으로 기가 막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통함과 북받히는 설움을 느꼈다"며 "이제 어느 누가 큰어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백 선생님처럼 큰 나무가 필요하다. 많이 그리울 것"이라고 전했다.
유족을 대표해 여동생 백인순 씨가 인사했다. 백 소장의 하나뿐인 동생인 백 씨는 "오라버니는 오로지 노나메기 벗나래(세상)을 이루고자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그러나 오라버니는 벗날에 계시지 않아서 제 마음이 찢어진다"며 "걱정마시고 부디 편히 쉬라"고 했다.
하관식은 이날 오후 2시부터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서 진행됐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엄수된 19일 오전 고인이 생전에 매일 찾아 커피를 마시며 사색했던 서울 종로구 학림다방에서 유가족이 영정 앞에 커피를 드리고 있다. /이동률 기자 |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백 소장은 지난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67년에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을 시도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됐다. 이후 1986년에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힘써왔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저서를 낸 작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sejungkim@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