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헌의 체인지(替認知·Change)] 정인이 사건, 우리 사회 모두가 부끄럽다
입력: 2021.01.05 14:18 / 수정: 2021.01.05 14:18
정세균 국무총리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아동학대 관련 긴급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하고 있다./이동률 기자
정세균 국무총리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아동학대 관련 긴급 관계장관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하고 있다./이동률 기자

경찰의 안이함도 한 몫...국민 분노 폭발, 제도적 뒷받침 필요

[더팩트ㅣ김병헌 기자]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탤런트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봉사활동 후 2004년 펴낸 수필집의 제목이다. 영어 속담 "여자 아이들은 맞아선 안 돼. 꽃으로도 (Girls shouldn't be hit, not even with a flower)"에서 따온 듯하다.

‘꽃으로도...’는 앞서 2002년 출간된 스페인 교육자 프란시스코 페레(1859∼1909) 평전의 제목으로 국내에서 처음 사용됐다. 저자인 박홍규 영남대 교수가 붙였다.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선생의 법설에도 같은 의미의 표현이 있다. 선생은 사람과 만물을 대함에 있어 주의할 점을 깨우치는 대인접물(待人接物)의 말미에서 ‘아이를 때리는 것은 하늘을 때리는 것(물경타아 타아즉타천의/輕勿打兒 打兒卽打天矣)’이라고 설파했다.

아이는 소중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말은 표현의 차이가 다소 있을지 몰라도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조되어 왔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떤가? 아동학대는 지금도 끊이질 않는다. 아이가 죽음에 이르는 최악의 사례도 드물지 않다.

새해 이튿날인 지난 2일에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또 한 아이의 참혹한 죽음이 세상에 알려졌다. 입양된 지 9개월 만에 사망한 16개월 여아 ‘정인이 사건’은 전국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사망 당일인 지난해 10월 13일 정인이는 세 차례 심정지 끝에 응급실에서 사망했다. 당시 정인이는 온몸에 멍이 들고, 팔다리는 물론 쇄골 등에 골절이 된 상태였다. 특히 췌장이 절단돼 배에는 피가 가득 고인 상태였다.

‘외력에 의한 복부 손상’으로 사인을 판단한 의사는 학대를 의심하며 경찰에 신고한다. 그 결과 여아를 입양해 키운 양부모가 상습적으로 폭력을 가한 것으로 드러난다. 안타까운 것은 경찰은 그 전에 세차례 걸쳐 학대 의심 신고를 받았으나 번번이 무혐의 종결 처리 했다는 대목이다.

세 번 중 한 번이라도 아니 단 한 명의 담당 경찰관이라도 적극적으로 탐문과 추적에 나섰다면 정인이는 살 수 있었다. 경찰 조사에 엄청난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말이 안된다. 범죄의 도덕적 공범이라 해도 경찰은 할 말이 없다.

경찰이 정인이 사건과 관련 국민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운데 4일 김창룡 경찰청장과 박정훈 국가경찰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북관에서 국가수사본부 현판식을 하고 있다./김현민기자
경찰이 '정인이 사건'과 관련 국민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가운데 4일 김창룡 경찰청장과 박정훈 국가경찰위원회 위원장 등 관계자들이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북관에서 국가수사본부 현판식을 하고 있다./김현민기자

지난해 5월 정인이가 다닌 어린이집이 가장 먼저 경찰에 학대 의심 신고를 했다. 온몸의 멍 때문이었다. 경찰은 양부모 변명을 듣고 조사를 멈춘다. 6월에는 이웃 주민이 정인이 혼자 승용차에 오랫동안 남겨진 광경을 보고 신고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 신고는 소아과 의사. 정인이 사망하기 20일 전 112에 신고했다. 정인의 입이 억지로 벌려서 낸 것 같은 상처가 있었고, 지나치게 야윈 것을 보고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그때도 정인이가 입에 염증이 생겨 잘 먹지 못했다는 양부의 주장을 믿고 무혐의 처분한다.

같은 경찰서에서 조사했지만 할 때 마다 담당경찰관이 달랐다. 그래도 2차 3차 조사 때 신고 이력이라도 조회했으면 정인이는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1, 2차 조사 경찰관에겐 경징계 처분(경고 또는 주의)을 내렸다. 3차 수사 관련자들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있지만 담당들을 제외하고는 책임지는 윗 사람이 없다는 사실도 시민들은 다시 한번 분노케 한다.

관련 경찰들을 엄중 처벌해야 한다는 요청은 지금도 쏟아지고 있다. 경찰청 홈페이지에는 5일 현재 이 사건을 맡은 경찰에 대한 비난 등의 글이 600개 이상 게재됐다. 양천경찰서 홈페이지는 "정인이 죽인 공범" "서장 물러나라" 등 비난이 쇄도하다 한때 서버가 다운됐다. 이와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에 올라온 청원만 '아동학대 방조한 양천경찰서장 및 담당경찰관 파면 요구'등 6건이다. 5일 현재 15만명에 이른다.

경찰은 학대 의심 신고 당시 경찰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아동학대 사건 특성상 적극 대응이 어렵다는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

한 경찰관은 "아동 학대 의심 신고는 증거 수집이 매우 힘들다"면서 "아이들은 의사표현이 서투른 경우가 많고 집 등 현장에 CCTV가 설치되어 있어도 부모가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거나 증거를 내놓는 경우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의사 등 전문가 소견도 직접 증거는 되지 않는 등 어려움이 많아 법정 다툼이 될 소지가 많다는 설명이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열린 아동학대 예방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번 간담회는 최근 발생한 정인이 학대사건 등 그간 반복적으로 발생해온 아동학대 실태를 파악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국회사진취재단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열린 아동학대 예방책 마련을 위한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번 간담회는 최근 발생한 '정인이' 학대사건 등 그간 반복적으로 발생해온 아동학대 실태를 파악하고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기 위해 열렸다. /국회사진취재단

문재인 대통령은 4일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을 통해 "입양 아동을 사후에 관리하는 데 만전을 기하되 입양 절차 전반의 공적 관리·감독뿐 아니라 지원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면서 "보건복지부 등 관계 부처는 입양의 전 절차에 '아동의 이익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입양특례법 4조)는 원칙이 철저하게 구현될 수 있도록 해 달라"라고 지시했다.

정부도 5일 정세균 국무총리 주재로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아동학대 관련 긴급 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했다. 정치권은 여야가 앞다투어 예방책 약속 등 대안을 내놓고 한마디씩 했다.

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최고위원은 4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아동학대 예방 입법과 관련해 "정인이의 가엾은 죽음을 막기 위해 아동학대 형량을 2배로 높이고 가해자 신상을 공개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실제 그동안 아동학대로 구속 기소된 이들 10명 중 1명만이 실형을 선고받는다는 사실은 양형 또한 피해아동의 기준에서 선고되지 않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제라도 처벌 강화와 함께 피해자인 아동의 입장과 피해 아동을 보호하고 지켜봐 왔던 관련 전문가들과 국민들의 목소리가 양형의 최우선 기준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대한민국은 올들어 공식적인 인구 감소국가가 되었다. 출생자가 사망자보다 더 적다는 얘기다. 아이들이 안전하게 자라도록 지켜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정인이 사례만 봐도 태어난 아이를 지켜주지도 못하는 나라에서 출산율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지 부끄러울 따름이다. 아이들의 억울한 죽음이 더이상 생기지 않도록 정치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반성하고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제발...

bienns@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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