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상습적으로 제작한 경우 최대 징역 29년3개월을 선고할 수 있다는 양형기준을 제시했다. 사진은 뉴욕 타임스퀘어에 걸린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 투 비디오' 운영자 손정우 씨를 엄벌해야 한다는 옥외광고. /케도아웃 트위터 |
#. 2016년 사회를 경악하게 만든 일명 '인분 교수' 사건. 한 대학교수가 제자를 2년여간 야구방망이 등으로 때리고 얼굴에 최루액을 뿌리는가 하면 강제로 인분을 먹이기까지 한 것이 밝혀지며 온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다. 수원지법 성남지원 형사1부(고종영 부장판사)는 이 대학교수에게 양형 기준 상한인 10년 4개월이 넘는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훼손하고, 인격을 말살하는 정신적 살인 행위'라는 이유에서였다.
#. 지난해 9월 충북 진천 한 제조업체 건물 증축공사 현장에서 근로자 2명이 철제 구조물 위에서 용접을 하다 5m 아래로 떨어져 숨졌다. 당시 사고현장에는 추락 방지망도, 작업자들을 지탱해 줄 안전장치도 없었다. 청주지법 형사1단독 남성우 부장판사는 추락 위험이 있는 곳에 안전조치를 하도록 명시한 산업안전보건법을 어긴 해당 사업주에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유사한 사건에 벌금형을 해오던 관행을 깬 이례적 판결이었다. 남 판사는 "안전조치 의무를 게을리해 피해자들의 사망이라는 중한 결과가 발생됐으므로 죄질이 무겁다"고 양형 이유를 밝혔다.
양형기준을 벗어나거나 기존의 판결 관행을 깼지만 국민의 법감정에 한걸음 다가선 판결들이다. 둘쭉날쭉 판결을 막기 위해 양형기준이 필요하지만 반대로 이 같은 선제적 판결이 많아져야 새로운 유형의 범죄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최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을 상습적으로 제작한 경우 최대 징역 29년3개월을 선고할 수 있는 양형기준을 제시했다. 디지털 성범죄 관련 솜방망이 처벌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자 국민 법상식에 맞는 새로운 기준을 정한 것이다.
양형위는 디지털 성범죄에 엄벌을 원하는 여론을 감안해 양형기준을 직접적인 성폭력 범죄의 양형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여 잡았다. 아동·청소년성착취물 제작의 기본 형량을 징역 5~9년으로 정했는데, 이는 청소년 강간죄 기본형량 징역 5~8년과 유사한 수준이다. 판사들은 앞으로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을 상습적으로 제작한 경우 징역 10년6개월~29년3개월형, 영리를 위해 상습적으로 판매한 경우 6~27년형, 상습적인 배포의 경우 4~18년을 선고할 수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자료사진 / 남용희 기자 |
그러나 지금과 같이 새로운 범죄 유형을 만날 때마다 판사가 기존 양형기준대로 판결을 내린다면 '손정우 사례'를 반복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손정우는 2015년 7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아동 성착취물 공유 다크웹사이트인 웰컴투비디오(W2V)를 운영한 혐의로 고작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미국 법무부가 우리 사법부에 그의 송환을 요청했지만, 우리 사법부가 수사에 지장이 생긴다는 등의 이유로 거절하면서 올해 7월 풀려났다.
새로운 범죄를 가장 먼저 접하는 판사들의 선제적 판결이 쌓여 양형기준을 바꾸는 근거로 쓰일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존의 양형이탈 판례가 새 양형기준 설정에 반영되지 않는 현 시스템에서 판사들이 굳이 판결문에 이탈 사유를 적으면서까지 양형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판사들은 형을 정할 때 양형기준안을 참고하며, 이를 벗어난 판결을 내릴 때는 판결문에 그 이유를 적어야 한다.
승 연구위원은 "미국 버지니아주에서는 양형위원장이 지난 1년 동안 양형을 이탈한 판례를 모아 분석하고 국회의 승인을 통해 그 결과를 새 양형기준에 반영한다"라며 "버지니아주 판사들은 새로운 유형의 범죄를 판단할 때 국민 눈높이에 맞는 양형을 제시할 의무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기존 양형기준에 얽매이지 않으면 판사들이 새로운 범죄를 대하는 시각 자체가 달라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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