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왜 '개망신'이었을까
입력: 2020.08.22 00:00 / 수정: 2020.08.22 00:00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강제징용 사건 재판 거래를 포함해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나서는 박 전 대통령의 모습. /이새롬 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은 강제징용 사건 재판 거래를 포함해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다. 사진은 지난 2017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를 마친 뒤 법원을 나서는 박 전 대통령의 모습. /이새롬 기자

'사법농단' 재판에 나온 어느 청와대 수석의 업무수첩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강제징용 건과 관련해 조속히 정부 의견을 대법원에 보내라. 개망신이 안되도록, 국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수석의 2015년 12월 26일자 업무수첩이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하는 대법원 판결이 나오면 '개망신'이라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을 받아 적은 것이다. 이 수첩의 주인인 김규현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사법농단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국익을 최대한 증진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했다.

김 전 수석은 2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고영한 전 대법관의 속행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이같이 밝혔다.

양 전 원장 등은 법관 재외공관 파견 확대라는 숙원사업 추진을 위해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배상을 청구한 사건의 재상고심도 그 중 하나였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 당시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 취지를 유지하기 위해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해선 안된다는 청와대 입장을 반영하려 했다.

김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이같은 박 전 대통령의 의중이 잘 드러나 있다. 김 전 수석이 박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용을 받아 적었다는 업무수첩에는 "강제징용 건과 관련해 조속히 정부 의견을 대법원에 보내라", "개망신이 안되도록", "국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등의 문구가 담겼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박 전 대통령은 "개망신이 안되도록 하라"고 말한 뒤 본인 생각에도 부적절한 표현이었는지 곧바로 "세계 속 한국이라는 위상을, 국격이 손상되지 않도록 지혜롭게 처리하라"고 고쳐 말했다.

한 시민이 인천 부평공원에 세워진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덕인 기자
한 시민이 인천 부평공원에 세워진 강제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을 기리는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덕인 기자

이날 김 전 수석은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배상 청구권을 인정해선 안될 이유로 '한일관계'를 들었다. 대법원의 청구권 인정 판결이 나온 이듬해인 2013년 9월 김 전 수석은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만나 "재상고심 사건은 한일 외교관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사건"이라는 대화를 나눴다고 증언했다. 양 전 원장 측 변호인이 이와 관련한 반대신문을 진행할 때였다.

변호인: 강제징용 사건이 외교부 입장에선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증인이 "한일 외교관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해요. 하나의 사건에 불과할 수도 있는데 왜 근간을 흔들 정도라고 하신 건가요?

김 전 수석: 아시다시피 한일관계가 정상화된건 1965년 한일기본조약 협정과 함께 한일청구권 협정이 타결되면서입니다. 이 협정에 따라 개인 청구권은 완전히 소멸된 것으로 정부 입장을 취해 왔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에서 개인 청구권을 인정하는 판결이 있었기 때문에…외교 관계에서 엄청난 파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잘 기억하시겠지만 같은 시기 위안부 문제가 한일관계를 엄청 경색케 만들었어요. 그런데 이 문제까지 겹치면 더 큰, 심대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정부 인식이었습니다.

당시 대법원과 청와대는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하면 외교적 파장이 크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제출하도록 외교부를 압박한 것으로 조사됐다. 김 전 수석은 "우리 국익 확보를 위해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인: 외교부가 대법에 잘 설명해야 한다는 건, 그것이 곧 대한민국 국익에 도움되기 때문인가요? 일본과의 외교적 갈등만을 겁내서 그런 건 아니었죠?

김 전 수석: 네. 무엇보다 우리나라 국익을 위해서입니다. 큰 외교적 문제는 이러저러한 저희 입장을 대법에 전달해야겠다고 생각했고요. 저희로선 다른 고려사항은 없었습니다. 우리나라 국익을 최대한 증진하고 국제 사회에서 저희가 당당한 일원으로서, 우리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기 필요하다는 차원이었습니다.

대법원과 청와대, 외교부가 '국익'을 위해 강제징용 사건 논의를 할 동안 시간은 맥없이 흘러갔다. 2018년 10월 대법원은 피해자 1인당 1억 원을 배상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해야한다는 상고심 판결이 나온 지 6년 만이다.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첫 소송을 제기한 건 1997년, 국내 소송이 시작된 건 2005년이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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