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사진)과 헌법재판소 등 사법기관의 지방 이전이 국회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다. /남용희 기자 |
헌재 결정서 자유로워…"법무부는 국회와 가야" 의견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국회에서 행정수도 이전과 함께 대법원과 헌법재판소 등 사법기관을 비 수도권 지역으로 옮겨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사법기관의 지방 이전은 예전에도 필요성이 논의된 바 있어 행정수도 이전 움직임이 본격화될 경우 공론화 가능성도 적지않다. 다만 이전에 따른 효과가 있는지 냉정히 따져봐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행정수도 이전론은 지난 20일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청와대와 국회, 정부 부처 모두 세종시로 이전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어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당대표 후보 첫 합동연설회에서 수도권 과밀화 현상을 해소하겠다며 그 방안으로 '사법기관 이전'을 들었다. 박 의원은 헌재와 대법원을 각각 광주와 대구로 이전해야 한다는 구체적 주장을 펴기도 했다. 역시 당권 도전에 나선 이낙연 전 총리도 "헌재와 대법원 이전도 검토할 가치가 있다"는 입장이다.
권영진 대구시장도 헌재·대법원 대구 이전을 주장하며 옛 경북도청 터가 최적지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세종시 갈 뻔했던 대법원·사법연수원…법원행정처는 땅 사놓기도
사법기관 이전이 논의된 역사는 깊다. 2004년 6월 신행정수도추진위원회는 충청권에 건설될 행정수도로 옮길 85개 국가기관을 잠정 확정해 발표했는데, 이 중 대법원과 사법연수원도 포함됐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헌법재판소는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렸다. '우리 수도가 서울'이라는 관습헌법 사항을 개헌하지 않은 채 하위 법률 방식으로 수도를 이전하는 건 위헌이라는 이유다. 헌재의 위헌 결정으로 행정수도 이전 계획 자체가 틀어지며 극히 일부 행정부처만 충청권으로 옮겨졌다. 사법기관 역시 서울에 남게 됐다.
당시 대법원 산하 기관인 법원행정처는 추진위 발표 뒤 "이전하면 근처에 연수원 겸 휴양시설을 만들면 좋을 것 같다"며 충남 안면도에 1만7000여 평 면적의 땅을 미리 사들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이전 계획이 무산된 뒤인 2005년 감사원에서 "막연한 장래의 일로 토지를 취득하면 안된다"는 지적을 받았다.
법원행정처는 2018년에도 서울 명동의 한 빌딩으로 이전될 뻔 했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농단 의혹의 중심점에 있는 법원행정처를 대법원과 떼어 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대법원 차원에서 추진한 이전 계획이었다. 대법원은 국회에 임차비 56억8500만원과 이사비용 약 22억 원 등 80억 원 가량의 예산안을 제출했지만 국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전 계획은 무산됐다.
사법기관 이전이 국회에서 다시 거론된 건 2010년의 일이다. 세종시 출범을 앞두고 김무성 당시 한나라당 의원은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를 세종시로 이전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김 의원의 제안은 소속당 내에서도 "행정부처에 비해 사법기관은 경제적 실익이 떨어진다"는 반박에 부딪혀 지지를 모으지 못했다. 결국 김 전 의원의 제안은 당소속 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 당론 변경 투표에 밀리면서, 사법기관 이전은 또 불발됐다.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사진) 등 사법기관의 지방 이전이 국회에서 다시 거론되고 있다. /남용희 기자 |
◆'서울에 둔다' 법원조직법 개정해야 대법원 이전 가능
사법기관 이전이 다시 화두로 떠오른 지금, 사법기관의 이사는 법적으로 가능할까.
우선 16년 전 헌재 결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헌재는 수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국가 정치·행정의 중추기능을 가진 중앙 행정기관들이 소재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입법기관, 즉 국회는 수도로서 성격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봤다. 반대로 중앙행정기관이나 입법기관이 아닌 사법기관의 이전은 헌법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법조계 중론이다. 헌재는 '헌법재판권을 포함한 사법권이 행사되는 장소', 즉 사법기관은 수도를 결정하는 필수적인 요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실제로 설립 당시에는 서울에 있던 특허법원(고등법원급)은 '각급법원의 설치와 관할 구역에 관한 법률' 개정만으로 2000년 특허청이 있는 대전으로 이전 됐다. 특허관련 국가기관이 밀집된 대전지역으로 이전해 특허소송 업무가 더 원활히 수행된다는 기대에 따른 결단이었다. 반면 특허법원 판사를 비롯한 일부 법조인들은 특허사건을 다루는 변호사·변리사는 물론 사건 당사자들도 대부분 수도권에 거주하는 경우가 많다며 대전 이전을 반대하기도 했다.
하급심 법원과 달리 대법원의 경우 헌법의 벽은 없지만 법원조직법 개정이 필요하다. 법원의 소재지를 규정한 법원조직법 제12조는 대법원에 대해서만 "서울에 둔다"고 명시했다. 법조계에서는 법적으로 소재지를 서울로 규정할 정도로 대법원을 서울에 둘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헌재 역시 별다른 소재지 규정이 없다.
하승수 변호사(세금도둑잡아라 공동대표)는 "사법기관이 꼭 서울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특히 각 지방법원과 고등법원이 있기 때문에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까지 서울에 모여 있어야할 이유는 없다"면서도 "개헌과도 연계해서 논의할 필요가 있고, 부동산 투기 억제 등을 감안하여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이전할 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논의가 필요하다"이라고 봤다"라고 봤다.
법무부 이전은 헌법적 문제와 뗄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한 법학과 교수는 "법무부는 정부조직법상 행정부처로, 국회에 주기적으로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국회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효율적이다. 지금도 세종에 내려간 행정부처 관계자들이 차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다만 국회가 움직이려면 개헌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2004년 위헌 결정이 난 행정수도 이전 여론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국토교통부, 환경부,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세종정부청사. /임영무 기자 |
◆대법원·헌재 이전해도 법조인 이동은 적을 듯
일각에서는 사법기관 이전은 경제적 실효성이 없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관을 이전하는데 드는 비용과 노고에 비해 해당 기관에도, 이전할 지역에도 이익이 없다는 설명이다. 특히 헌재와 대법원처럼 법률심 재판을 하는 사법기관의 경우, 장기간 재판 당사자들이 출석해 변론하는 일이 드물다. 이에 따라 사법기관이 옮겨 갔다고 해서 '서초동 법조타운' 처럼 로펌이 모이거나, 법관과 공무원 등 종사자들이 주거지를 아예 옮기는 일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서초동의 중견 변호사 A씨는 "어쩌다 한 번 가는 대법원과 헌재가 이전한다고 해서 법조인들의 생활이 크게 달라질 부분은 없을 것 같다. 변호사들도 출장 개념으로 선고기일에나 참석하지, 아예 사무실을 옮기는 등의 효과는 없을 것"이라며 "차라리 사법적 수요가 있는 지역에 고등법원·지방법원급 법원을 증설하는 방안을 검토하는게 더 바람직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대법원과 마주한 대검찰청 이전에 대해서도 "실익이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A 변호사는 "실무보다는 전국 검찰을 관할하는 상징적 기관이라, 어디로 이전하든 큰 의미가 있을지 싶다"고 봤다. 익명을 요청한 또 다른 변호사 B씨 역시 "대검이 지방으로 이동한다고 해서 현안으로 떠오른 수사지휘권 등 검찰 권한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역 발전 측면에서도 사법기관 이전은 큰 실효성이 없을 거라는 의견이 있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 일자리를 늘려야 하는데, 사법기관 이전이 지역 일자리 생산에 큰 공헌을 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설명이다.
마강래 중앙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과 교수는 "사법기관 이전이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실효성 있는 대안이라고 보기 힘들다. 어떤 기관을 일단 옮겨 놓으면 발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너무 낙관론적"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섣불리 대법원이나 헌재 같은 큰 기관을 어느 지역으로 옮기겠다고 말하는 건 이전 지역 물망에 오른 지역 간에 괜한 갈등만 부추길 수 있다. 지금 주요 사법기관이 서울에 모여 있으면서 내는 시너지 효과를 능가할 만큼 이전 시 지역발전에 도움이 될지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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