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 막아라"…대법관의 '치밀한 스타일'
입력: 2020.07.23 00:00 / 수정: 2020.07.23 10:52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양승태 86차 공판…'강제징용 소송 지연' 의혹 심리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치밀하고 꼼꼼하셨습니다."

2011년 2월~2015년 2월 대법원 재판연구관을 지낸 황 모 부장판사는 자신에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재상고심 사건 검토 및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던 김용덕 전 대법관을 이같이 기억했다. 그가 쓴 보고서는 '양승태 대법원'이 청와대 뜻에 따라 소송을 고의로 지연시키고, 나아가 피해자들이 패소하도록 방안을 검토했다는 이른바 '재판 거래' 의혹의 핵심 증거다.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사법농단 의혹'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86차 공판기일에는 황 부장판사가 증인으로 나왔다.

2013년 김용덕 당시 대법관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재상고심 주심을 맡게 됐다. 앞서 2012년 5월 대법원은 한일 청구권협정을 근거로 피해자들의 소송을 기각한 원심 판결이 잘못됐다며 사건을 돌려보냈다. 파기환송심 재판부 역시 같은 취지로 판결했다. 하지만 피고 신일철주금이 재상고하며 판단의 공이 대법원으로 되돌아왔다. 이듬해 그는 황 부장판사에게 이 사건 검토 및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최초 소송 제기가 1997년, 20여년 만에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한 법원 판결이 나온 셈이었다. 하지만 이날 법정에서 제시된 황 부장판사의 보고서에는 피해자들의 승소를 꺼린 대목들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2012년 판결에 여러 문제점이 있음", "강력한 이유 대지 않는 이상 판결 파기 어려움", "한일 청구권 협정 효력에 의해 원고 소송을 기각하면 다시 외국 판결을 승인해야 하는 결론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문제점이 있음" 등의 내용이 쓰였다.

황 부장판사는 이듬해 2월 법관 인사로 법원행정처를 떠날 예정이었다. 그는 애초 김 전 대법관에게 "(피고 신일철주금의) 상고 이유와 요지, 결정 등만 간단하게 보고드리겠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인상'과 '느낌'을 토대로 10쪽 분량의 간략한 보고서를 냈으나 김 전 대법관은 성에 차지 않았다. 황 부장판사는 정기 인사 전까지 강제징용 사건의 쟁점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보고서들을 써냈다.

검찰은 '양승태 대법원'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정권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입장에 따라 강제징용 사건 재판을 고의로 지연시켰다고 보고 있다. 대법원 현안 추진을 위해 강제징용 사건을 '거래 대상'으로 여겼다는 설명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양 전 원장은 사건 주심인 김 전 대법관을 만나 이같은 뜻을 전달했다. 김 전 대법관은 담당 재판연구관인 황 부장판사에게 "청구권 협정으로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는 논리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했다.

인천 부평공원에 설치돈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을 기리는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의 모습. /이덕인 기자
인천 부평공원에 설치돈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들을 기리는 '일제강점기 징용노동자상'의 모습. /이덕인 기자

이날 재판에 증인으로 선 황 부장판사는 보고서 내용 대부분에 대해 "김 전 대법관의 지시대로 썼다"고 증언했다. 또 그는 "보고서 작성 당시 쟁점은 한일 청구권협정이었다"고 인정했다.

김 전 대법관의 '스타일'이 거론된 것도 이때였다. 검찰은 "통상적인 사건과 달리 담당 재판연구관에게 쟁점별 심리 사항부터 사건 처리를 언제,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시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황 부장판사는 "경위는 잘 모르겠다. 대법관들마다 스타일이 다르다"고 답했다.

반대신문에 나선 양 전 원장 측 변호인단은 김 전 대법관의 스타일에 집중했다. 변호인은 "제가 들은 평판에 따르면 김용덕 전 대법관은 사건 전체를 꼼꼼히 검토하고 체크하는 스타일"이라며 "다른 대법관보다 검토할 양이 많다는 평판이 재판연구관들 사이에 돈다"고 말했다. 황 부장판사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변호인은 또 "대법관은 담당 재판연구관에게 사건의 검토 방향을 지적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등 관여할 권한이 있다"고 변론했다.

김 전 대법관이 결론을 정해 놓고 업무 지시를 한다고 느낀 적은 없냐는 변호인의 질문에 황 부장판사는 즉답을 피했다. 재판 말미 재판부가 "증인은 이미 2012년 대법원에서 있었던 판결을 왜 쟁점별로 검토하는지 의문을 가진 적 없느냐"는 질문에는 "파기환송심 판결로 나온 새로운 쟁점에 대해 검토한 것"이라고 했다.

2018년 1월 김 전 대법관이 퇴임할 때까지 강제징용 재상고심 판결은 나오지 않았다. 9개월 뒤 대법원은 파기환송 5년 만에 피해자들의 승소를 확정지었다.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이춘식 씨와 여운택 씨, 신천수 씨, 김규수 씨 등 4명이었지만 원고승소 확정을 지켜본 이는 이춘식 씨 뿐이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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