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3선 서울시장을 거쳐 여권의 유력 대통령 후보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사진은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당시 박 시장/더팩트 DB |
인권변호사에서 유력 대통령 후보까지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9일 운명한 고 박원순 서울시장은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3선 서울시장을 거쳐 여권의 유력 대통령 후보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삶을 살아왔다.
그는 1955년 2월 11일 경남 창녕군 장마면 장가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세명의 누나와 형, 아래로 여동생을 뒀다. 박 시장은 생전 형제와 달리 배움의 길을 걷지 못 한 누나와 여동생에게 마음의 짐을 감추지 못 했다.
재수 끝에 명문 경기고에 진학한 그는 서울대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학내시위에 참여했다가 학교에서 제명되고 4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가 시위 중 체포됐던 날은 저녁에 여대생들과 미팅 약속이 있었다는 뒷이야기도 유명하다. 단 한 발 차이로 청년 박원순의 운명은 달라졌다.
서울대와 인연은 짧았지만 전화위복이었다. 법원 고등고시에 합격해 22세에 강원도 정선 등기소장으로 부임한다. 이후 단국대에 진학해 사법시험에 도전, 1980년 최종합격한다.
사법연수원(12기)에서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꾼 인물을 만난다. 고 조영래 변호사다. 그는 사법시험 합격 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하다 뒤늦게 연수원에 들어와 박 시장의 동기가 된다. 박 시장은 자기 인생의 스승이자 존경하는 인물로 주저없이 조영래 변호사를 꼽았다. 생전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있었다면 그분이 서울시장을 하고 나는 비서실장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그의 연수원 동기다.
첫 부임지는 대구지검이었는데 검사가 영 체질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을 벌주는 게 싫어서, 혹은 술이 약해 그랬다는 말도 있다. 결국 1년 만에 변호사로 개업했다.
고 조영래 변호사(1947~1990)/더 팩트 DB |
저작권법을 파고들던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끈 사람도, 시민운동가로 나서게 한 사람도 조영래였다. 그와 함께 한 망원동 수재사건, 구로동맹파업사건, 김근태 고문사건,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에서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알렸다. 1991년 병상에 누운 조 변호사가 유언처럼 남긴 "박변, 이제 더 넓은 세상을 살펴보라"는 말에 이끌려 영국과 미국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선진국 시민운동의 세계를 만난다.
한국에 돌아온 그가 변호사를 포기하고 만든 것이 참여연대다. 참여연대는 1996년 부패방지법 제정 운동, 1997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총선 낙천낙선운동 등으로 한국 시민운동을 이끌었고 그 주역은 박원순 사무처장이었다는데 크게 이견을 다는 사람은 많지않다.
참여연대가 사회개혁을 추구했다면 '아름다운재단'은 일상의 개혁을 추구했다. 기부문화라는 개념을 국내 본격 도입한 아름다운재단 산하에 역시 국내 최초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을 만들어 사회적 약자를 지원하는 공익변호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자매단체인 아름다운가게에서는 '재활용 문화'의 기반을 쌓았다. 민간 비영리 싱크탱크의 시대를 연 '희망제작소'도 그의 작품이다.
진영을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줄잇던 정치권의 러브콜을 한사코 사양했던 그에게 정치 입문 계기는 불현듯 다가왔다. 서울시장 시절에는 아름다운재단 이사로 친분을 쌓았던 이명박 대통령이 계기를 제공했다.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운영을 방해하는 국정원의 공작을 폭로하자 정부가 그에게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원고 대한민국 정부, 피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상 초유의 소송이 벌어지게 된다. 박 시장은 훗날 이 일이 자신을 정치의 길로 들어서게 사건이었다고 뒤돌아봤다. "민주주의가 완성된 줄 알았는데 아직 갈 길이 멀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결국 법원은 "국가의 청구를 기각한다"며 박 시장의 손을 들어줬다.
백두대간 종주의 장고 끝에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고 당시 새 리더로 상종가를 달리던 안철수 교수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얻어냈다. 2011년 10월,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이 탄생했다./더팩트 DB |
오세훈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논란 끝에 사퇴하고 보궐선거가 다가왔다. 이번에는 주저하지 않았다. 백두대간 종주의 장고 끝에 서울시장 출마를 결심하고 당시 새 리더로 상종가를 달리던 안철수 교수에게 ‘아름다운 양보’를 받았다. 2011년 10월,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이 탄생했다.
박원순 시장은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했다. 취임 일성이 "대머리가 될 때까지 시민에게 충성하겠다"였다. 취임식은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조직문화는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문화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강조된 것은 ‘소통’이었다. 시민이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는 시정의 시대를 알렸다. 시청 지하를 ‘시민청’으로 바꿔 시민들에게 돌려줬다. SNS 팔로워가 200만이 넘는 ‘소통왕’이었다. 찾아가는 동주민센터, 환자안심병원, 청년수당, 반값등록금, 도시재생, 친환경무상급식, 서울자전거 따릉이 등 서울시에서 시작해 전국화되는 정책도 늘어났다. 특히 2016년 메르스 사태 때는 과감한 재난 대응으로 야권 유력 대선주자 반열에 오르게 됐다. 2011년 10월부터 2020년 7월까지 105개월 동안 3선에 성공한 최장수 서울시장 기록을 세웠다.
반면 2016년 서울지하철 구의역 스크린도어 참사는 박 시장 재직 중 대표적 실책으로 꼽힌다. 본인도 시장으로서 가장 후회되는 일로 이 사건을 꼽은 바 있다.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숨진 비정규직 스크린도어 노동자 김군의 가방에서 나온 뜯지 못한 컵라면은 시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후 박 시장은 시와 산하기관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열중했다.
박원순 시장은 인권 중에서도 여성인권에 정통하기로 잘 알려졌다. 1993년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변론을 맡아 "성희롱은 유죄"라는 최초 판결을 이끌어 한국 여성운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남성이 됐다. 그런 박 시장에게 성추행 의혹은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평소 완벽주의적인 성격 상 이후의 상황을 견디지 못 했으리라는 짐작도 많다. 생전 누구보다도 소통을 즐겨했지만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고민 끝에 괴로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과로사로 죽는 게 소원"이라고 할 정도로 일벌레였던 박원순. 한편으로는 다산 정약용처럼 유배지에서 독서와 집필을 하는 꿈을 꿨던 박원순. 충격적으로 찾아온 소식을 실감하는 사람은 아직 그리 많지 않은 듯 하다.
leslie@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