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정점에 서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26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이선화 기자 |
파견 법관 통해 헌재 정보 입수…양승태 측 "관행"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는 헌법재판소(헌재)가 빠지지 않는다. 사법기관을 놓고 대법원이 우위를 점하기 위해 헌재를 압박했다는 것이 '사법농단' 사태의 한 축이다. 헌재를 이기기 위한 법원의 전략은 "적을 알면 이긴다"였다. 양승태 대법원은 헌재 파견 법관을 통해 내부 분위기는 물론 계류 중인 사건과 이에 대한 헌법재판관들의 의견을 확보한 것으로 조사됐다. 재판에 넘겨진 사태의 핵심인물들은 "헌재와의 정보 교류는 관행"이라고 주장한다.
1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사태의 정점에 서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 고영한 전 대법관의 78차 공판에는 당시 대법원이 파견 법관을 통해 헌법재판관들의 의견 등 기밀 자료를 빼돌린 정황이 담긴 문건이 제시됐다.
양 전 원장 등은 헌재를 상대로 대법원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파견 법관에게 내부 동향과 기밀 자료를 보고하도록 하고, 심의관들에게 관련 대책을 검토해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하는 등 부당한 지시를 내린 혐의를 받는다.
당시 대법원이 빼돌린 대표적인 기밀 자료는 헌법재판관들의 평의 내용이었다. 평의란 헌법재판관 전원이 참석해 사건 심리와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는 회의로, 헌재 기록관도 동석할 수 없다. 헌재 파견 법관이었던 최희준 부장판사가 평의 분위기를 대법원에 보고하면, 이를 토대로 심의관들이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체계였다. 이날 검찰 측 서증조사 내용을 종합하면 대법원에서 파악한 헌재 사건은 한 지방 국립대학교 공무원의 헌법소원부터 긴급 조치, 과거사 사건 등이다.
대법원이 헌법재판관들의 평의에 촉각을 곤두세운 이유는 법원의 법률 해석이 위헌적이라는 취지의 '한정위헌' 결정이 내려지는 걸 막기 위해서로 풀이된다. 법원이 최고의 사법기관이어야만 했던 양승태 대법원으로서는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이 유난히 거슬렸다는 설명이다. 이미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업무방해 사건은 특히 역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소장에 따르면 최 부장판사에게 헌재 내부 자료를 직접 보고받은 이는 대법원 내에서도 헌법에 조예가 깊었던 이규진 당시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양형실장)이었다. 2015년 11월 이 전 실장은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사건에 대해 헌재가 한정위헌 취지로 기울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에게 관련 문건을 파일로 첨부해 이메일로 보냈다. 본문에는 "한정위헌 결정 시 비상 대처 방안을 정리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은 곧 대법원의 '비상 사태'였다. 같은 달 심의관들은 '업무방해죄 관련 한정위헌 판단의 위험성', '업무방해 한정위헌 문제점' 등의 문건을 생산해냈다.
대법원의 한정위헌 결정에 대한 염려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민주화보상법)에 관한 헌법소원 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6년 2월 최 부장판사가 이 전 실장에게 보낸 이메일에는 "민주화보상법과 관련해 ○○○ 재판관님의 위헌 내지 한정위헌 의견 강력히 예상된다"는 내용이 담겼다. 헌법재판관 중 누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이는지 실명도 그대로 썼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인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이 지난해 8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남용흐 기자 |
양 전 원장 측은 헌재에 파견나간 법관이 잘하고 있는지 등 일반론적 관여는 한 적 있지만, 헌재를 압박할 목적으로 내부 정보를 빼오라는 등의 지시를 한 적 없다는 입장이다. 헌재 사건에 관한 정보를 받고 검토하는 건 '관행'이었다고 한다. 이날 변호인은 "대법원에서 작성한 연구보고서들도 학술이나 재판 관련한 이유로 외부에 나가고, 더 나아가서는 변호사들에게도 제공되는 측면이 많았다"고 변론했다.
양 전 원장보다 좀더 일선에 가까웠던 나머지 피고인들은 "위법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박 전 처장 측 변호인은 "헌재와 법원은 사건과 쟁점이 겹치는 경우가 많고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 진행 상황을 봐야했다"고 해명했다. 그의 이름이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이 전 실장의 업무수첩에 대해서는 "이 전 실장은 '(박병대 당시) 처장님이 제게 앞으로 헌재 내부 동향을 파악하라고 지시해 수첩에 적었다'고 검찰에서 말했지만 법정 증언을 종합하면 정상적인 업무 지시로 추측 가능하다"며 "저 역시 학교다닐 때, 선생님이 영어로 말씀하셔도 한국어로 필기했다. 이 전 실장도 지시를 듣는 순간 자신의 생각을 합쳐 업무일지를 쓴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 전 대법관 측 변호인 역시 "피고인은 전달된 자료로 사적 이익을 추구한 것이 없다"며 "헌법 해석이 충돌하는 가운데 슬기롭게 해결하고 싶었고, 헌법 수호와 사법 신뢰 유지 차원의 대응을 했다"고 역설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핵심 인물 고영한 전 대법관이 지난달 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
당시 헌재 관련 업무에 동원된 법관들 역시 피고인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명확한 증언을 내놓지는 않았다. 다만 '정상적인 업무'로는 인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실장은 지난 5월 이 재판 증인으로 나와 헌재 내부 정보를 받은 것에 대해 "부적절했다고 인정한다. 다만 공유 차원이었다"고 말했다. 헌법재판관들 사이에서 '스파이'로 불렸다는 최 부장판사는 대법원의 요구에 대해 "꺼림칙했다. 후회된다"고 심경을 전했다.
이날 공판에서 다뤄진 내용에 따르면, 양 전 원장은 대법원 내에서 'CJ'로 통했다. 치프 저스티스(chief justice), 최고 법원의 수장이라는 의미다. 저스티스는 사법, 재판과 함께 정의와 공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양 전 원장의 대법원은 정의롭고 공정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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