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양승태는 '불쾌' 임종헌은 '괘씸'…"변협을 압박하라"
입력: 2020.06.25 00:00 / 수정: 2020.06.25 00:00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1월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대국민 입장 발표를 위해 하차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의 정점으로 지목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1월1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대국민 입장 발표를 위해 하차하고 있다. /남윤호 기자

양승태·박병대 76차 공판…현직 판사 "임종헌 지시로 문건 작성"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에 연루된 현직 법관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당시 대한변호사협회(대한변협)에 불쾌한 감정을 가졌다고 증언했다. 이 법관은 대한변협 압박 방안을 검토한 문건을 작성했는데, 문건 작성 지시의 정점에 누가 있었는지는 확답을 내놓지 못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24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 전 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의 76차 공판기일을 열었다.

이날 재판에는 2013~2014년 법원행정처 기획심의관으로 근무한 나상훈 부장판사가 증언대에 섰다.

2014년 9월 법원행정처에서는 '대한변협 압박방안 검토 보고', '대한변협 압박 방안 관련' 등의 문건이 작성됐다. 이 문건들은 김종복 당시 사법정책심의관과 이날 증인인 나 부장판사의 손끝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이 시기 대법원은 역점 사업이었던 상고법원 도입에 어느 때보다도 열성적이었다. 공소장에 따르면 '야심 차게'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대한변협이 상고법원 도입에 반대하자 대법원의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같은 해 열린 변호사 대회에서는 양 전 원장의 면전에서 대법관 증원을 요구하는 결의문이 채택되기도 했다. 대법관 증원론은 상고법원을 따로 도입하기보다 대법관 수를 늘려 재판 업무를 나누자는 주장이다. 상고법원 도입을 추진 중인 양 전 원장이 참석한 행사에서 "상고법원 도입은 안 된다"고 결의한 셈이다.

나 부장판사는 당시 양 전 원장은 불쾌해 했고,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괘씸해 했다고 회고했다. '검찰 수사 당시 임 전 실장은 대한변협을 괘씸해 했고, 양 전 원장은 변호사 대회 때 불쾌해 했다고 진술했는데 증인의 기억에 따라 진술한 것이 맞느냐'는 검찰의 질문에 나 부장판사는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많이 격앙됐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변호사 대회를 언짢아하셨던 건 맞다"고 대답했다.

임 전 실장은 괘씸한 감정에 그치지 않았다. 김종복 전 심의관에게 '대한변협 압박 방안 검토 보고'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 김 전 심의관이 써온 문건에 따르면 예산 지원과 광고 게재를 중단하는 등 경제적 압박부터, 대법원 행사에 대한변협을 초청하지 않고 반대로 대한변협 행사에 대법원은 전면 불참하자는 등 노골적 방안도 검토됐다.

또 임 전 실장은 이 보고서를 나 부장판사에게 보내 "방안을 더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대한변협 압박이라는 바통을 이어받은 나 부장판사는 '대한변협 압박 방안 관련' 문건을 작성했다. 예산 규모 축소와 교류행사 중단 등의 내용과 함께, 태스크포스(TF)을 꾸려 변호사 평가제를 도입하자는 방안이 더해졌다.

나 부장판사는 임 전 실의 지시로 이 문건을 썼다고 시인했다. 그는 "임종헌 실장님께서 저를 불러 다른 심의관이 작성한 보고서를 주시면서 기획조정실 문체로 좀 바꿔보라고 지시하셨다"고 했다.

다만 나 부장판사는 변호인 반대신문에 이르자 이 재판 피고인인 양 전 원장과 박 전 처장의 관련성은 철저히 부인했다. '임 전 실장이 작성을 지시할 당시 변호사 평가제 TF에 대해 대법원장의 정책 결정 사안이라거나, 그분에게 보고할 거라는 얘기를 했느냐'는 양 전 원장 측 변호인의 질문에 나 부장판사는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진 '상부에 어떻게 보고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정책이) 결정됐는지 임 전 실장이 증인에게 설명한 바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설명하지 않았다. 상부에 보고했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다"고 답변했다.

박 전 처장 측 변호인의 '이 사건 공소장에는 피고인 양승태, 박병대가 임종헌 등과 공모했다고 나와 있는데 증인이 보고서를 만들 당시 처장이나 차장, 대법원장이 지시한 바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나 부장판사는 "없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이 처장 등 상급자 지시를 따라 증인에게 지시했다고 볼 만한 사정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없었다"였다.

이날 나 부장판사의 증인신문 내용을 종합하면, 임 전 실장은 대법원장의 숙원 사업에 반기를 든 대한변협을 괘씸해 하며 홀로 압박 방안을 검토했다는 것이다. 변협을 압박한 이는 과연 임 전 실장뿐이었을까.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이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 처장이 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임세준 기자

공소장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이듬해 아예 대한변협 회장을 겨냥해 압박할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김종복 전 심의관은 TFT에 남아 형사사건 성공보수 규제 등 압박 방안을 계속 검토해야 했지만 나 부장판사는 심의관 임기 만료로 대법원을 떠났다.

나 부장판사는 일선 법원에 복귀한 심의관들의 '정석 코스'를 따라 서울서부지법 판사로 1년 근무한 뒤 기획 법관을 맡았다. 심의관 시절 인연 때문이었을까. 나 부장판사는 광고업체에게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박선숙·김수민 의원의 영장을 통째로 스캔해, 그 사이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승진한 임 전 차장에게 전달하기도 했다. 나 부장판사 역시 이듬해 대구지법에 부장판사로 부임, 지금도 현직 법관으로 근무 중이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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