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자신이 그린 것처럼 속여서 판매한 혐의로 기소된 가수 조영남 씨 사건의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창작의 개념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이새롬 기자 |
"누가 그렸는지보다 콘셉트가 중요" vs "자기가 그린척 쇼한 것"
[더팩트ㅣ대법원=김세정 기자] 그림 대작 논란으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조영남 씨의 대법원 공개변론에서 창작의 개념을 두고 치열한 논쟁이 펼쳐졌다.
대법원 1부(주심 권순일 대법관)는 28일 오후 대법원 대법정에서 사기혐의로 기소된 조영남 씨와 조 씨의 매니저 장 모 씨에 대한 상고심 공개변론을 진행했다. 미술 작품을 제작할 때 작가가 조수를 기용한 경우, 이를 작품 구매자들에게 사전에 알려줘야 하는지가 쟁점이었다.
우선 검찰은 "피고인의 작업 방식은 추상적 아이디어만 제공하거나 똑같이 그려달라고 했을 뿐, 구체적 지시 내용이 없었다"며 조 씨의 그림을 그려준 송 모 씨가 조수가 아닌 '대작 화가'라고 주장했다. "피고인이 유명 연예인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액으로 구매했다. 대작 화가가 그린 것을 구매자들에게 사전에 알려줘야 했다"며 사기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조 씨 측은 "조영남 씨 자신의 사상과 철학에 따라 (작품을) 실현할 방법을 정해서 조수들에게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창작 행위를 했기 때문에 피고인의 단독 저작물"이라 설명했다. 이어 사전 고지의무에 대해서는 "현대미술에서는 미술 본질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있다. 원칙적으로 작가가 조수의 기용을 고지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조영남 씨 측 변호인단은 미술계 전문가를 불러 의견을 들었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는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이, 조영남 씨 측 참고인으로는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검찰 측 참고인으로 출석한 신제남 한국전업미술가협회 이사장은 조영남 씨의 행동에 "작가적 양심이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행각"이라 주장했다. 사진은 2018년 8월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온 조 씨의 모습. /이덕인 기자 |
우선 신제남 이사장이 마이크 앞에 앉았다.
검찰: 피고인 조영남은 조수 기용이 관행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렇습니까??
신 이사장: 조수 관행 없습니다. 혼자의 작업으로 이뤄지는 게 창작자의 의무고, 상식입니다. 다만 키보다도 큰 대형 작품을 하면 조수를 쓸 수 있지만 한 공간에서 감독과 지시가 있어야 하고 (조수의) 이름을 밝혀야 합니다.
검찰: 피고인 조영남은 송 씨 등 회화전문가에게 아이디어 제공하고 작품을 그려달라 하고, 덧칠 작업만 한 후에 판매했는데, 이를 두고 조수를 기용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까?
신 이사장: 송 작가는 미술을 전공한 프로작가입니다. 아마추어가 프로 작가에게 아이디어를 주고 조수로 썼다는 것에 우리 미술인들은 분노합니다. 먼 곳에 있는 조수가 대부분을 그려 옮겨온 작품에 조금 손보는 척하고, 사인하는 것은 작가적 양심이 결여된 수치스러운 사기행각입니다.
이어 검찰이 조영남 씨의 작품 하나를 보여주고, 의견을 묻자 신 이사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 이사장: 저도 조영남 씨가 방송에서 작업하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이 간과해선 안 될게 있습니다. 전문 작가들은 액자가 끼워져 있는 상태에서 그림을 손보지 않습니다.
검찰: 조영남 씨가 액자를 끼운 상태에서 작업하는 게 잘못된 겁니까?
신 이사장: 화가들은 완성하면 그림을 액자에 끼웁니다. 액자를 끼운 상태에서 한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검찰: 피고인이 액자에 끼운 상태에서 일부 덧칠하는 '쇼를 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까?
신 이사장: 상식적으로 화가라면 액자 끼운 건 손을 안 댑니다. 액자 끼운 걸 이젤 위에 올린 건 큰 실수라고 봐야죠.
신 이사장은 조영남 씨의 행위에 대해서 미술인으로서 수치스럽다며 수위 높은 비판을 했다. "장애인 작가들이 왜 힘들게 붓을 입으로 잡고, 발가락으로 그리겠나. 예술가이기 때문에 혼자의 힘으로 그리는 것"이라 언급하며 조 씨에게 "앞으로는 당당하게 혼자만의 작업을 그려서 진정한 작가의 길로 들어서길 바란다"며 날 선 충고를 전했다.
변호인 측 참고인으로는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이 참석했다. 표 전 회장은 "본인의 생각을 그려넣은 작품이면, 본인의 작품이다"라고 언급하며 조 씨 측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이새롬 기자 |
이어 변호인 측 참고인으로 40여 년간 미술계에 몸담은 표미선 전 한국화랑협회 회장의 순서가 이어졌다. 표 전 회장은 신 이사장과 '조수 관행'에 다른 입장을 보였다.
변호인: 조수들의 도움받는 관행이 있나요? 영향은 어디까지인가요?
표 전 회장: 네. 조수를 쓰는데 작가마다 다 다릅니다.
변호인: 작가가 자기보다 보고 그리는 실력이 조금 더 뛰어난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을 도와주도록 지시하는 경우도 작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나요?
표 전 회장: 그렇죠. 본인의 생각을 그려 넣은 작품인데, 본인의 작품입니다.
변호인: '물리적인 제작 과정을 모두 작가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현대미술계에서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죠?
표 전 회장: 네 아닙니다. 15, 16세기에는 초상화 개념의 그림이 많았습니다. 후에 사조가 바뀌면서 1917년쯤 뒤샹이 소변기를 내놨습니다. '다다'라는 사조가 생겼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작가들이 개념이 담긴 작품을 할 수 있습니다.
변호인: 작가보다도 조수가 더 물리적 개입을 해도, 작품의 콘셉트를 구상하고, 최종적으로 사인을 하는 이상 작가의 작품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표 전 회장: 그렇습니다.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을 언급한 표 전 회장은 신 이사장과 달리 물리적인 작품 제작 과정을 작가가 모두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조수 관행'이 미술계에 있고, '도움을 받더라도 작품의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으면 작가의 것'이라는 조 씨 측 주장과 같은 견해를 보였다.
변호인: 참고인의 갤러리에 전시했던 작가 중에서도 조수 도움을 받는 작가가 있나요?
표 전 회장: 네 있습니다.
변호인: 갤러리에서 조수의 도움에 관해 설명하나요?
표 전 회장: 일반적으로 안 합니다. 만약에 묻는다면 대답을 합니다.
변호인: 조수의 도움을 받은 걸 숨기기 위해서 설명하지 않는 건 아니죠?
표 전 회장: 아닙니다.
변호인: 조수 사용을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는 경우가 있나요?
표 전 회장: 37년간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현대미술에서 '창작의 핵심'은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한 표 전 회장은 조영남 씨가 조수를 기용한 것을 사전에 알았지만 조 씨의 예술적 평가에 영향이 없었다고 했다. 갤러리에서 조수의 도움을 언급하지 않는다며 사전 고지의무 위반이 아니라는 조 씨 측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조영남 씨는 최후진술에서 "남은 인생을 갈고 다듬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참된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살펴주시길 울어 청한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사진은 이날 공개변론을 마치고 차에 탑승한 조 씨의 모습. /김세정 기자 |
변론 과정을 담담하게 듣던 조영남 씨는 마지막 최후진술에서 준비한 편지를 꺼내 낭독했다. 조 씨는 "잘 그렸냐 못 그렸냐 논란은 옛날 미술 개념으로 느껴진다"면서 "남은 인생을 갈고 다듬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참된 예술가가 될 수 있도록 살펴주시길 울어 청한다"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이어 "옛날부터 어르신들이 화투를 갖고 놀면 패가망신한다고 했는데 제가 너무 오랫동안 화투를 가지고 놀았나보다. 부디 제 결백을 알려 달라"고 언급했다.
조영남 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화가 송 씨에게 작품 1점당 10만 원을 주고 화투를 소재로 한 자신의 기존 작품을 회화로 그려오게 하거나, 추상적인 아이디어만 제공하고 그려오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 씨는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송 씨에게 약 200점 이상의 완성된 그림을 받아서 배경색을 일부 덧칠하는 등 경미한 작업만 하고, 서명한 후 자신의 작품으로 판매해 사기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조 씨의 혐의를 유죄로 보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조수 기용이 현대미술에서 통용되고 있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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