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일제강점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시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3차 변론기일에서 일본 정부의 관여를 입증할 공문서들이 공개됐다. 사진은 지난해 8월14일 오후 서울 중구 옛 조선신궁터 부근에서 열린 2019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 제막식에서 공개된 동상들. /이동률 기자 |
일본국 상대 손배소 3차 변론서 공문서 제시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정부가 자국에서는 미성년자를 위안부로 모집하지 못 하도록 한 공문서가 법정에서 나왔다. 하지만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이를 지키지 않아 수많은 어린 여성들이 피해를 입어야 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서울중앙지법 제15민사부(민성철 부장판사)는 1일 오후 5시 고 곽예남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3차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일본 정부와 육군 등이 주도적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공문서들이 여럿 공개됐다. 증거자료는 많았지만, 피고 측 자리는 비어 있었다.
원고 측 주장을 종합하면 위안소는 1932년 중국 상해 동부에 첫 설치를 시작으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전역으로 확대됐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 뒤 필리핀 마닐라 등 동남아 지역에도 위안소가 설치됐다. 일본 정부가 위안소를 운영한 이유는 일본군들의 사기 증진과 성병 예방, 점령 지역의 부녀자 강간 방지를 위해서였다.
당초 일본 정부는 위안부 동원 대상으로 만 16~30세 신체 건강한 여성을 특정했다. 1938년 중국 내 위안소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자 일본 내무국 경무국장이 작성한 통첩에는 "황군(일본군) 위상을 위해 위안부를 모집할 때 성매매에 종사한 적 있는 만 21세 이상 여성만 뽑아라"는 내용이 담겼다. 일본 측도 성매매에 종사하지 않는 미성년자를 위안부로 동원하는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원고 측 변호인단은 "일본군과 정부도 미성년자 모집은 불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며 "하지만 식민지였던 조선은 해당되지 않아 어린 여성들이 동원돼 정신적·신체적 피해를 입었다"고 설명했다.
'제1404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집회'가 지난해 9월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다. /김세정 기자 |
일본 육군이 위안소를 직접 운영하고 관리한 정황도 드러났다. 1942년 '위안소 규정 송부의 건'에는 "군 간부가 위안소를 운영하고, 위안부 외출을 단속하라"는 내용이 담겼다. 1943년 작성된 '영외시설 규정'에는 "1942년 기준 장교 이하 병사를 위한 위안소가 중국내 140개가 있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비슷한 시기 육군 회의록에는 위안소 운영방식이 △일본군 직영 △민간시설을 빌려 운영 △위탁 운영 세 방식이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외에도 위안부 동원에 일선 경찰과 지방청도 관여한 사실을 입증할 문서도 공개됐다. 1938년 육군이 일본 내무성에 보낸 문서에는 "일본군 위안부 400명을 모집해 이송 중이니 각 내무성과 지방청은 편의를 제공하라"고 적혔다. 비슷한 시기 상해 총영사관 경찰서장이 작성한 공문에는 "전선 각지 장병 위안부 모집을 위해 여행하는 자들이 있으니 (배) 승선시 편의를 봐주라"는 내용이 포함됐다.
이같은 증거자료를 토대로 원고 측 변호인단은 "위안부는 민간업자 주도가 아니라 일본 내무성과 군인들이 체계·조직적으로 운영한 시스템"이라며 "20만명에 달하는 많은 여성들이 일본 정부에 의해 물리적·정치적 피해를 입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변호인단은 또 인권 침해 사건에서 '주권면제원칙'이 적용될 수 없다며 이 분야 전문가인 백범석 경희대학교 교수를 증인으로 신청했다. 주권면제원칙이란 외국의 재판권이 주권 국가에 미칠 수 없다는 이론으로, 일본 측이 재판을 거부 중인 주된 사유다.
4차 변론기일은 5월20일 오후 4시30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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