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피 21년 만에 붙잡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55) 씨가 1일 징역7년을 선고받았다. 사진은 지난해 6월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으로 압송되는 정 씨의 모습. /남용희 기자 |
"도피 중에도 횡령 범행…수법 나쁘다"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아버지인 고 정태수 회장의 한보그룹이 부도나자 수백억 상당의 재산을 횡령하고 국외로 도피했던 정한근(55) 씨가 징역7년을 선고받았다. 정씨가 1998년 도피한지 22년만에 내려진 첫 사법적 판단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1일 오후 2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재산국외도피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씨의 선고공판을 진행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경영권 유지라는 사익을 위해 수백억에 달하는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 그 피해가 회복됐다고 볼 여지도 없다"며 "도피 중에도 이같은 범행을 저지르고, 범행으로 공소가 제기되거나 구속될까봐 공범의 도피를 교사하는 등 범행 수법이 나쁘다"고 판시했다.
또 "피고인은 오랜 기간 도피하며 자신의 가족이나 지인을 쉽게 만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면서도 "그 어려움에 공감되는 점도 있지만 이 역시 모두 피고인이 자처하고 야기한 것으로 유리하게 참작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징역7년에 추징금 401억3193만8000원을 추징했다.
다만 "'사우스아시아 걸프 코퍼레이션'이라는 다른 명의로 들여왔지만 상당한 미화를 국내로 들여 대한민국 국민의 재산이 해외로 유출됐다고 볼 수는 없다"며 "횡령액 중 대부분을 인정하고 반성한 점, 횡령액 상당 부분이 피해자 회사 대금으로 사용된 점 등을 정상 참작했다"고 밝혔다. 1997년 이른바 IMF 사태 뒤 '외국환관리법'이 폐지되는 등 외화에 대한 국내 규제가 완화된 점도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반영했다고도 했다.
황색 수의에 마스크를 착용한 정 씨는 지난해 국내 송환 때와 비교했을 때 눈에 띄게 야윈 모습이었다. 재판부가 30분 남짓 판결문을 낭독할 동안 지긋이 눈을 감고 있었다.
지난 18일 결심공판에서 검찰은 정 씨에게 징역12년·401억여원의 추징금을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정 씨는 고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로, 1997년 11월 한보그룹이 부도나자 한보그룹 자회사이자, 사실상 정 씨가 실소유주였던 동아시아가스주식회사(EAGC) 자금을 스위스에 있는 타인명의 계좌로 예치해 횡령하고, 재산을 국외로 빼돌린 혐의 등을 받는다.
검찰에 따르면 정 씨는 당시 실소유주로 있던 동아시아가스가 보유했던 러시아의 (주)루시아석유 주식 27.5% 중 20%를 러시아의 시단코회사에 5790만 달러에 매도했지만, 2520만 달러에 매각한 것처럼 허위계약서를 작성해 3270만 달러를 빼돌렸다. 당시 환율 기준으로 환산하면 323억원에 달하는 수치다.
지난 1월에는 동아시아가스 자금 약 66억원을 추가로 빼돌린 혐의로 추가기소됐다. 정 씨의 총 혐의액은 386억원 상당이다.
1998년 6월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던 정 씨는 이후 도주해 21년간 잠적했다. 지난해 6월22일 에콰도르에서 체포돼 국내로 송환됐다.
지난 결심 공판 최후 변론에서는 "도피생활 중 제가 저지른 어리석은 잘못을 끝없이 반성하며 지냈다. 지금도 하루하루가 참회의 생활"이라며 "죗값을 치르고 가족 품에 돌아가겠다. 열심히 살면서 가족과 사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ilraoh@tf.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