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보석(조건부 석방)으로 풀려난 뒤 처음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뉴시스 |
'주4회 재판'에 검찰·변호인 격돌…지켜보는 재판부도 '막막'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송주원 기자] "수고하셨습니다. 먼저 퇴정하세요."
'사법농단' 사태 핵심 인물 임종헌(61·사법연수원 16기)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제36형사부 재판장을 맡고 있는 윤종섭(50·26기) 부장판사의 목소리에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꼬박 4시간 동안 진행된 임 전 차장의 공판은 아직 보석의 안도감에 젖어있을 임 전 차장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피고인 측 재판부 기피로 8개월간 재판이 중단된 탓에 검찰은 주4회 공판까지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변호인단은 주1회도 버겁다고 맞섰다.
16일 오후 2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기소된 임 전 차장의 26차 공판 법정. 재판부 기피 신청으로 8개월간 중단된 재판이 재개된 뒤 맞는 세번째 재판이었다. 13일 임 전 차장이 재판부 허가로 503일만에 보석 석방된 뒤 출석한 첫 재판이기도 했다. 오후 1시44분께 법원에 들어선 임 전 차장은 수감시절 입던 검은 정장이 아닌 하늘색 셔츠에 남색 넥타이를 맨 차림이었다. 취재진과 만나서는 "어려운 보석 결정을 내려 주신 재판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피고인으로서 보석 조건을 철저히 준수하고 재판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날 재판에는 밀린 서증조사와 함께 앞으로 재판을 어떻게 진행할지 논의가 이뤄졌다. 검찰은 피고인 측 재판부 기피 신청으로 재판이 오랜 시간 중단된 만큼 속도감있게 재판을 진행해야 한다고 포문을 열었다.
"증거조사는 공판중심주의 아래 형사재판 심리 절차의 핵심입니다. 쟁점에 대한 집중적 재판 진행이 화두인데 증거조사 진행은 10퍼센트 수준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정 종합할 때 주3회 내지 4회씩 진행하는게 타당합니다. 피고인 측은 종전 변론 준비를 위해 검토 시간이 필요하다고 피력하셨는데, 이미 이 재판 약 8개월간 중지돼 충분한 시간이 확보됐을 것이고 피고인이 보석 석방돼 의사소통 문제 역시 해소됐으리라 생각합니다." (검찰)
'관련 사건 증인신문 조서는 언제쯤 제출할 계획이냐'는 재판부 질문에 검찰은 바로 "오늘 내일 중 제출하겠다"고 자신을 보였다. 임 전 차장 측은 반발했다. 이미 방대한 기록과 빼곡한 재판 일정으로 잇따른 변호인 사임을 경험한 터였다.
"이 사건 재판이 중단된 동안 저희가 이 기록만 들고 있었던 것도 아닐 뿐더러 그 양이 방대해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주3회 재판을 진행하며 기록을 파악해서 변론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 증인신문 당시에도 신문사항 준비를 다 못 끝내 검찰 주신문 때 여기 앉아 준비했습니다. 관련 사건과 비교했을 때 이 사건만 유독 일주일에 서너번 하자고 하시는데, 증인신문 준비할 시간도 없습니다." (변호인)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보석(조건부 석방)으로 풀려난 뒤 처음으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1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들어서며 발열검사를 받고 있다. /뉴시스 |
양 측의 공방을 지켜 보던 재판부는 15분 가량 휴정 시간을 갖고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재판부도 마음이 복잡했다. 윤 부장판사는 "우선 사건 심리 순서에 대한 재판부 입장을 먼저 말씀드려야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1시간 가까이 향후 재판 진행계획에 대해 홀로 말을 이어갔다.
"제가 부장으로 겸임 중인 이 법원 제32형사부에서는 피고인 이민걸과 이규진 사건을 맡고 있습니다. 이 사건과 이민걸 등 사건은 공소사실이 겹칩니다. 중복된 공소사실인 만큼 예단없이 심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민걸 등은 2월로 예정됐던 이 사건 피고인 임종헌의 증인신문까지 미루며 '중복된 공소사실을 다 심리하는대로 잡아 달라'는 입장입니다. 중복된 공소사실 심리부터 진행해야 재판부 심증 형성과 예단에서 오는 모순을 막을 수 있습니다." (윤 부장판사)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이민걸(59․15기) 전 대법원 기획조정실장·이규진(58·18기)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은 임 전 차장 지시로 움직인 법관들이다. 이에 따라 △양승태 대법원의 헌법재판소에 대한 영향 과시 △통합진보당 소송 개입 △매립지 귀속 분쟁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등 공소사실 상당 부분이 겹친다. 넉 달 먼저 재판에 넘겨진 임 전 차장 공판이 8개월간 헛바퀴를 돌리는 동안 이들의 재판은 사실상 매주 진행됐다. 같은 재판부 심리인 만큼 먼저 진행된 사건에서 형성된 심증을 가진 채, 뒤늦게 발을 맞추고 있는 임 전 차장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고민이었다. 윤 부장판사는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린 건 이 사건이 원활하게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해해달라"며 자신의 제안에 대한 의견을 검찰과 변호인단에게 물었다.
재판 일정을 놓고 대립했던 검찰과 변호인도 재판부 제안에 별다른 이견을 내지 않았다. 당초 임 전 차장은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위안부 피해자 재판 개입 건을 다루고 있었으나 공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됐다. 대부분 증인들이 외교부 인사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출입국이 가능할지 미지수였기 때문이다.
한숨 고른 재판부는 대법원 위상 강화를 위해 헌재에 파견된 법관을 이용한 내부 자료 수집건부터 심리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위해 검찰에 서증조사 계획서와 증거목록을 정리한 표를 공소사실별로 분류해 20일까지 제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직권남용죄에서 '의무없는 일'을 세부적으로 봐야 한다고 판시한 최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에 대한 의견서를 제출하라고도 했다.
통상 재판부가 퇴정 뒤 법정 내 인원이 자리를 떠나지만, 이날 재판부는 "먼저 퇴정하시라"고 말한 뒤 방청석이 듬성듬성 빌 동안 앉아 있었다. 임 전 차장은 변호인단과 이야기를 나누며 법정을 나섰다.
임 전 차장의 속행 공판은 3월23일 오후 2시로, 검찰이 제출한 계획표에 따라 재판 일정을 정할 예정이다. 이날 결정을 보류했던 주4회 재판에 대한 결정도 내려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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