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2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54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뉴시스 |
코로나 사태 속 열린 '사법행정권 남용' 양승태 공판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장우성 기자] "법정에서는 모두 마스크를 반드시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부장판사의 당부에 법정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썼다. 판사도, 검사도, 피고인도, 변호사도, 방청객도, 경위도, 기자도 열외는 없었다. N95인지, KF94인지 마스크의 종류만 조금 다를 뿐이었다.
마스크는 방역에는 필수불가결이지만 재판 진행은 다소 껄끄러워졌다. 증언이 잘 들리지 않았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김모 김앤장 변호사는 목청이 작은 편이었다. 마스크까지 겹벽을 쌓으니 더 그랬다. 재판장도 답답했던지 "마스크를 벗고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그냥 쓰고 하겠다고 했다.
증인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검사들도 신문에 열중하다보니 자신이 덮개 속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잊은 듯 했다. 증인 신문 과정을 기록하던 기자들은 못 참겠다는 듯 하나 둘 씩 앞 좌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스크를 쓰니 표정도 알 수 없었다. 법정에서 이따금 드러나는 표정은 많은 것을 읽게 해준다. 검사든, 증인이든, 피고인이든 그렇다. 모두 본의 아니게 '포커페이스'가 됐다.
'코로사19 시대' 한복판 낯선 풍경 속에 열린 1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55회 공판. 양 전 대법원장의 폐암 수술로 두달, 코로나19 휴정기로 19일간 헛바퀴를 돌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는 갈길이 멀다는 듯 "마스크를 써달라"는 말 외에 의례적인 덕담 한마디 없이 서둘러 재판을 진행했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김모 김앤장 변호사는 2016~2018년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으로 일하면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지시에 따라 '부산 법조비리 은폐 의혹'에 얽힌 각종 보고서를 썼다.
이 사건은 2015~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문모 부산고법 부장판사는 평소 친분이 있는 지역 건설업자에게 향응을 받고 영장 기각 등 1, 2심 재판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이 건설업자는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 5000만원을 준 혐의로 기소됐다. 1심은 무죄였다.
검찰이 문 부장판사 의혹을 파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법원행정처는 당혹스러웠다. 이미 '정운호 게이트'로 양승태 사법부 위신이 땅에 떨어진 마당이었다. 재판 진행에 불만을 품은 검찰이 '부산 법조비리 의혹'을 언론에 흘리기라도 하는 날엔 재기 불능 상태에 빠질 게 뻔했다.
법원행정처는 부산고법에 "문 부장판사에게 구두 경고 정도를 주고 건설업자 재판은 변론을 1~2차례 재개해 문 부장판사가 퇴직할 때까지 선고를 미뤄달라"고 전달했다. 문 부장판사는 잡음이 일자 정기인사에 맞춰 퇴직 의사를 밝힌 상태였다. 이 요구는 박병대 법원행정처장과 윤인태 부산고법원장을 거쳐 이 사건 재판장인 김모 부장판사까지 전달됐다. 결과는 법원행정처가 그린 그림대로 문 부장판사 퇴직 후 징역 8개월 선고가 나왔다. 이른바 '재판 개입'이 성공한 셈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지난해 8월 2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남용희 기자 |
이날 증인 김 변호사는 자신이 작성한 '문○○ 부장판사 관련사항', '고영한 처장님 말씀자료' 등 보고서에서 "(검찰에게) 항소심은 제대로 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보안을 지켜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검사 : 변론이 종결된 재판에 변론을 재개해달라고 법원장을 거쳐 하달하는 건 일선 법원 재판에 개입하는 부당행위라고 판단하지 않았습니까?
증인 : 지시 하달이 아니라 요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 모호한 면이 있었지만...깊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검사 : 이 보고서에 '김모 부장판사 외에 배석판사에게도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의 부탁'이라고 쓴 건 (재판개입 행위가)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였나요?
증인 :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같은 '부적절한' 사실은 양승태 대법원장까지 보고됐을까. 김 변호사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과 박병대, 고영한 법원행정처장까지는 보고됐지만 양 대법원장도 알았는지는 모른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검찰 조사에서는 대법원장에게도 보고될 만한 사안이라고 진술했다.
검사 : 윤리감사관실 소관업무는 규정상 결재라인이 법원행정처 차장-처장-대법원장인데 대법원장까지 보고하는 사안은 뭐가 있습니까.
증인 : 법관 비위 사항입니다. 직무 관련 금품수수라든가 언론 노출 우려가 있는 사안입니다.
검사 : (법관에 대한)법원장 구두 경고도 대법원장 보고 사안인가요?
증인 : 네.
다만 김 변호사는 당시 문 부장판사의 비위 의혹이 검찰 수사단계까지 가지 않아 "지나간 이슈 정도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비위를 전해듣고 윤리감사관실 자체 조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은폐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취지다.
박병대 전 대법관(법원행정처장) 측은 증인 반대신문에서 "대검이 (문모 부장판사 의혹을 법원행정처에)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해줬을 뿐 정식 비위 통보가 아니었다"며 문 부장판사 비위를 덮으려했다는 혐의를 반박했다. 당시 대검은 문 부장판사 관련 의혹을 정식 공문이 아닌 2장 짜리 보고서로 요약해 박병대 당시 법원행정처장에게 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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