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법관들에 대해 연이어 무죄 선고를 내렸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대법원의 정의의여신상. /더팩트DB |
검찰 수사 관행부터 직권남용 입증까지 '첩첩산중'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2017년 의혹 제기로 시작된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법관들에게 법원이 잇따라 무죄를 선고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대법원장이 구속된 만큼 '국정농단'과 더불어 주목을 받았지만, 최근 법관 5명이 혐의를 벗었다. 이들 5명의 혐의는 사태의 핵심 인물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사실과도 상당 부분 겹친다. 이에 따라 내년에야 1심 결론이 예상되는 양 전 원장과 임 전 차장의 재판에 얼마나 영향을 줄지도 이목이 쏠린다.
◆'유해용 판결문' 살펴보니…첫 피의자신문부터 삐걱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법관 중 가장 먼저 1심 재판이 마무리된 이는 유해용(54·사법연수원 19기)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다. 유 전 연구관은 2016년 대법원에서 근무하며 임 전 차장 지시로 박근혜(68) 전 대통령의 '비선 의료진'으로 알려진 박채윤 씨의 특허소송 상고심 재판 경과 등을 정리한 문건을 휘하 재판연구관에게 작성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으로 지난해 3월 기소됐다.
이외에도 △해당 문건을 임 전 차장을 거쳐 청와대 등에 전달한 혐의(공무상비밀누설) △2014~2017년 대법원에서 재직하며 입수한 문건을 반출해 변호사 영업에 활용한 혐의(절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대법원 재직 시절 다룬 사건을 변호사 개업 후 수임한 혐의(변호사법 위반) 등 혐의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박남천 부장판사)는 지난달 13일 유 전 연구관의 모든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특히 사태의 핵심인물인 임 전 차장과 엮인 직권남용 혐의는 사실관계부터 특정되지 않았다고 봤다. 해당 혐의를 시인한 검찰 피의자신문조서를 신빙할 수 없는데다, 법정에서 나온 진술과 증거만으로 공모 행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취지다.
판결문에 따르면 유 전 연구관은 제1회 검찰 피의자신문조서에서 임 전 차장 지시로 '사안요약' 문건을 작성 및 전달했다는 공소사실을 놓고 "사건 진행 경과를 알려 달라는 임 전 차장의 부탁으로 (문건을) 보내줬을 가능성은 있다"며 임 전 차장과의 공모를 시인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피의자가 검사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으며 진술 초기에는 범행을 부인하다가 이내 시인한 양상에 비춰, 특신상태(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조사가 이뤄진 걸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변호인의 신문내용 필기를 제한하는 등 피의자의 심리를 불안하고 위축되게 만들었다는 이유다. 결국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피고인과 임 전 차장의 공모를 인정하기 어렵고 이를 인정할 다른 증거도 없다"고 짧게 판시했다. 공모 행위의 사실관계부터 불투명해지며 법리적 판단도 따로 하지 않았다.
'사법농단' 사태 정점으로 지목돼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7월22일 보석을 허가받고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남용희 기자 |
◆'양승태 공범'이 무죄인 이유 "검찰 수사자료는 비밀이 아니다"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당시 현직 법관이 의혹에 연루되자 검찰 수사자료를 대법원 법원행정처에 넘긴 혐의로 지난해 3월 재판에 넘겨진 신광렬(55·사법연수원 19기) 전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 부장판사·성창호(48·25기)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조의연(54·24기) 전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에 대한 법원의 판단 역시 무죄였다. 이들 3명의 혐의는 양 전 원장과 임 전 차장의 공소사실과 겹칠 뿐 아니라 각 공소장에 공범으로 적시돼 있다.
유 전 연구관의 경우 사실관계부터 모호하다고 봤던 것과 달리 이들의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제23형사부(유영근 부장판사)는 13일 선고 공판에서 대법원 측 지시로 피고인들이 검찰 수사자료를 취합해 전달한 행위는 실재했다고 인정했다. 다만 이러한 행위를 '범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이 받은 혐의는 형법 127조 공무상비밀누설죄로 "공무원 또는 공무원이었던 자가 법령에 의한 직무상의 비밀을 누설할 때" 성립된다. 하지만 피고인들이 취합해 대법원에 전달한 내용은 '비밀'로 볼 수 없어 범죄로 성립할 수 없다고 봤다. 정작 수사를 담당한 검찰이 언론 브리핑이나 사법연수원에서 인연을 맺은 법관들에게 알려주는 '관행'이 반복돼 수사내용을 직무상의 비밀로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재판 개입, 헌법 위배지만 형법 위반은 아니다?
사법농단 사태를 관통하는 혐의내용은 바로 재판 개입이다. 양 전 원장 등은 당시 대법원의 역점 사업이던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와 이해관계가 얽힌 재판에 개입해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한 것으로 조사됐다.
임성근(56·27기) 서울고법 부장판사 역시 재판 개입으로 직권남용죄가 적용된 법관 중 한 사람이다. 14일 서울중앙지법 제25형사부(송인권 부장판사)는 임 부장판사에 대한 선고 공판을 열고 "재판 개입은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측면에서 위헌적이고 징계 사유에 해당한다. 하지만 사법행정권에 속하는 직무로 볼 수 없어 직권남용 범죄로 볼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장을 따로 불러 판결문을 수정하게 하는 등 개입 행위가 실제로 이뤄졌고 법관 징계 사유에 해당할 정도로 잘못된 일이지만, 형법상 직권남용죄가 성립되지 않아 처벌할 수 없다는 취지다.
형법 123조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 행사를 방해하는' 범죄다. 직권 범위와 남용 기준이 명문화돼 있지 않아 입증이 까다로운 범죄에 속한다. 지난 1월 직권남용죄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첫 판단이 있었지만 기준 제시 대신 "의무 없는 일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엄격한 취지의 판례를 내놔 입증의 벽은 더 높아졌다.
검찰은 재판 개입 혐의를 받는 법관들에 대해 대부분 직권남용죄를 적용해 기소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재판에 개입한 혐의 등을 받는 양 전 원장은 47개 혐의 직권남용죄가 중 41개에 달한다. 옛 통합진보당 소송 사건에 개입한 혐의 등을 받는 이민걸(59·15기) 전 대법원 기획조정실장, 이규진(58·18기)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방창현(47·28기) 전 심상철(63·11기) 전 서울고등법원장 역시 지난해 3월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부당한 재판 개입이 인정됐는데도 무죄를 선고받은 임 부장판사의 판례에 비춰볼 때, 이들의 직권남용 혐의 역시 입증이 쉽지 않을 걸로 보인다.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 씨가 2018년 10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 재상고심 선고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양 전 원장 등은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이들의 재판 진행을 방해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뉴시스 |
결국 재판 개입 행위는 법관의 독립성 침해는 물론 국민이 공정하게 재판받을 권리를 규정한 헌법에 반하는 행위지만, 형법상 직권남용죄에서만큼은 자유로운 양상이다. 강신업 법무법인 하나 변호사는 "법관의 재판 개입은 도덕적으로 비난할 수 있지만 범죄로 성립할 수는 없다는 판시다. 재판에 개입해 직권남용죄에 걸려든 다른 법관들에 대한 판단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며 "재판 개입이라는 위헌적 행위를 단죄하고 앞으로 이러한 범행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해외 사례를 참고해 사법방해죄를 신설하는 등 대안 모색이 시급하다"고 제언했다.
법원이 사법농단 사태와 관련한 사건에서 연이어 무죄 선고를 내리자 '사법부의 제 식구 감싸기'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사실관계부터 모호하거나, 사실관계가 특정돼도 범죄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잇따르자 당초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미흡했던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이필우 법무법인 예율 변호사(입법발전소)는 "무죄 선고가 나왔다는 이유로 검찰의 기소가 무리했고 법원이 피고인을 감쌌다는 발상은 위험하다"며 "다만 그동안 관행으로만 여겨져 왔던 검찰 수사과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사실관계와 법리를 면밀히 따졌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은 가치가 있다. 앞으로 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도 이러한 기준이 동일하게 적용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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