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사법농단' 1000일 넘겨 첫 판결…아직 갈 길은 멀다
입력: 2020.01.14 05:00 / 수정: 2020.01.14 09:52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1월15일 오전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더팩트DB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를 받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1월15일 오전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입장 발표를 하고 있다. /더팩트DB

'핵심' 양승태·임종헌 재판 지지부진…임성근 내달 선고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대법원 재판 연구 자료 유출 등 혐의로 기소된 유해용(54․사법연수원 19기)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유 전 연구관은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재판에 넘겨진 법관 중 가장 먼저 법원 판단을 받게 됐다. '양승태 대법원'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언론을 통해 제기된 지 1044일 만이다.

◆상고법원 도입을 둘러싼 '사법부 블랙리스트'

사법농단 사태의 시작은 2011년 9월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양승태(72·2기) 전 대법원장의 '숙원'이었던 상고법원 도입과 맞닿아 있다. 지금까지 검찰 수사를 종합하면 양 전 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에 비판적인 법관들에게 인사불이익을 줬다. 상고법원 도입에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정부 입장을 재판에 반영하려 시도하는 등 사법행정권을 남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사법부 블랙리스트'와 재판 거래 의혹이다.

문제가 수면 위로 드러난 건 2017년 법관들로 구성된 국제인권법연구회의 소모임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이하 '인사모')이 법관 독립성 강화를 위한 인사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학술대회를 계획하면서다. 인사모는 인사제도는 물론 사법행정에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숙원사업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법관들을 '관리'해야 했던 양승태 대법원에 인사모는 성가신 존재였다.

양 전 원장은 법관들에게 중복으로 가입한 연구회를 기한 내 정리하고, 기한을 어기면 가입한 연구회는 전산상 탈퇴 조치를 하겠다고 공지했다. 사실상 국제인권법연구회를 겨냥한 조치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수사가 본격화되며 밝혀진 바에 따르면 양 전 원장은 학회 중복 가입을 금지해 인사모의 몸집을 줄인 뒤 대적할 만한 연구회를 많이 만들어 인사모가 자연스럽게 소멸되도록 유도할 계획이었다.

대법원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에 갓 부임해 이 광경을 지켜본 이탄희(42․34기) 변호사는 거세게 항의하다 결국 사직서를 제출했다. 일이 커질 걸 우려한 대법원은 이 변호사의 행정처 발령을 취소했고 이 같은 인사 번복이 같은 해 3월6일 경향신문 보도로 세상에 알려지며 사법농단 의혹의 불씨를 던졌다.

◆첫 진상조사 결과 "근거 없음"…수장 바뀌니 "강제징용 재판 개입"

의혹이 제기된 뒤 양 전 원장은 이인복(64․11기) 당시 대법관에게 진상조사를 맡기고, 이 전 대법관의 제안에 따라 법원행정처 핵심 인사였던 임종헌(60․16기)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을 직무에서 배제시켰다. 고영한(65․11기) 당시 법원행정처 처장은 의혹 제기 직후 스스로 근무를 포기하고 겸임하던 대법관 업무에만 몰두하겠다는 뜻을 밝힌 상황이었다.

이 전 대법관이 이끈 진상조사위원회는 한 달이 지난 4월18일 "사법행정권 남용 및 법관 인사 블랙리스트 의혹은 아무 근거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같은 해 9월22일 양 전 원장은 "정치세력의 부당한 영향력이 사법부에 침투할 틈이 조금이라도 허용되면 어렵사리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질 것"이라는 퇴임사와 함께 6년여 간 지켜온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새로운 수장을 맞이한 대법원은 다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김명수(61․15기) 대법원장은 취임 한 달을 조금 넘긴 11월3일 추가조사를 결정하고 추가조사위원회를 꾸렸다. 민중기(61․14기) 당시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지휘봉을 잡은 추가조사위는 법원행정처 컴퓨터를 확보․조사하고 임 전 차장과 이규진(58․18기)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대면조사하며 본격적인 추가조사에 들어갔다.

해가 지나자 제기된 의혹은 점차 실체를 드러냈다. 2018년 1월 추가조사위는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으로 기소된 원세훈(69) 전 국정원장의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대법원과 청와대가 교감한 문건을 다수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해 2월 대법원은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당시 법원행정처 처장)을 발족시켜 조사에 박차를 가했다.

3개월 뒤 5월 특별조사단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결과 보고서에는 양 전 원장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 입법 추진을 위해 'BH'(청와대)에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 내려는 정황이 담겨 있었다. 청와대 협조를 구하기 위해 거래 대상으로 삼은 재판 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도 포함됐다.

◆피고석에 선 법관들…현직 법관 증인신문도 줄줄이

의혹이 가시화되며 연루된 법관들이 잇달아 재판에 넘겨졌다. 가장 먼저 기소된 법관은 양승태 전 원장 등 대법원 수뇌부와 일선 법관 사이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한 '사법농단 키맨' 임종헌 전 차장이었다.

2018년 7월21일 자택 압수수색을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27일 "범죄사실이 상당 부분 소명됐고, 증거인멸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한 달 뒤 검찰은 임 전 차장에 대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허위공문서작성 및 행사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국고손실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2019년이 되자 사태에 연루된 법관들이 무더기로 기소됐다. 1월 법원은 양 전 원장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한 달 뒤 검찰은 구속된 양 전 원장을 포함해 고영한․박병대(63․12기) 전 대법관을 직권남용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3월에는 유해용 전 연구관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 이민걸(59․15기)․신광렬(54․19기)․성창호(48․25기)․임성근(56․17기) 전 부장판사 등 법관 10명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공무상비밀누설 등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

이들의 재판이 본격화되며 현직 법관들이 증인으로 출석해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인연을 맺은 선․후배 법관들이 불편한 조우를 하는 일도 잦았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2018년 10월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더팩트DB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지난 2018년 10월15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고 있다. /더팩트DB

◆3년 만에 나온 법원 첫 판단은 '무죄'…양승태는 새해에도 '계속'

최초로 의혹이 제기된 지 3년차를 맞은 2020년에는 사태에 연루된 법관들에 대한 사법부 판단이 예정됐다.

법원의 심판을 받은 첫 주인공은 유해용 전 연구관이었다. 유 전 연구관은 지난 2016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으로 재임할 당시 임종헌 전 차장 지시를 받아 박근혜(68)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김영재․박채윤 씨 부부의 특허소송 재판 진행경과 등을 정리한 문건을 휘하 연구관에게 작성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으로 기소됐다.

이외에도 법원 내부 문건을 빼돌리고 해당 자료를 자신의 변호사 업무에 사용한 혐의(절도, 공공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개인정보보호법 위반)도 받았으나 유 전 연구관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8부(박남천 부장판사)는 13일 "검사의 증거만으로 유죄로 인정할 수 없고, 범의 역시 있었다고 볼 수 없다"며 모든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내달 14일에는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가토 다쓰야(54)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 재판에 청와대 입장을 관철시키려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임성근 전 부장판사의 선고기일이 잡혀 있다.

2016년 '정운호 게이트' 비리에 연루된 법관의 검찰 수사기록을 유출한 혐의 등을 받는 성창호, 신광렬, 조의연 전 부장판사 재판도 끝이 보인다. 신 부장판사는 지난달 양 전 원장의 53차 속행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하기로 했지만 "2020년 2월 하순경 제 재판이 마무리될 것 같아 그 뒤 출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신 부장판사 등의 사건을 맡은 형사합의23부(유영근 부장판사)는 13일 속행 공판에서 변론종결을 예고한 만큼, 이들의 선고 역시 2월 중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사태 핵심인 양 전 원장과 임 전 차장 재판은 지지부진하다.

47개 혐의로 기소된 양 전 원장의 재판은 예정된 증인만 230여 명으로 갈 길이 멀지만, 지난달 폐암 의심 진단을 받아 2월21일까지 재판이 연기된 상황이다. 현재 속도대로라면 1심 선고는 내년 상반기에나 가능할 전망이다.

'사법농단 1호'로 구속기소된 임 전 차장의 재판은 7개월째 공전 중이다. 임 전 차장은 지난해 6월 담당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6부(윤종섭 부장판사)를 상대로 기피신청을 내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이밖에 양승태 대법원 수뇌부의 회의 내용이 고스란히 적힌 업무수첩으로 검찰에 결정적 증거를 제공한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을 비롯해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법원장의 재판도 속도를 내지 못 하고 있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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