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이슈] '고개숙인 재판부' 낙동강변 살인사건 30년 만에 재심
입력: 2020.01.07 00:00 / 수정: 2020.01.07 00:13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전인 2017년 2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CGV에서 사법피해를 주제로 한 영화 ‘재심’ 관람에 앞서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누명을 쓴 장동익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이 사건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 전인 2017년 2월 24일 오전 서울 여의도 CGV에서 사법피해를 주제로 한 영화 ‘재심’ 관람에 앞서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누명을 쓴 장동익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왼쪽은 이 사건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뉴시스

박준영 변호사 "가족의 힘으로 '재심' 가능"

[더팩트ㅣ윤용민 기자] 1990년 1월 4일 새벽 부산 사상구 엄궁동 555번지 낙동강변 갈대밭. 당시 30세이던 여성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갈대밭에는 냉기가 감돌았고, 데이트 코스로 유명세를 타던 이곳엔 연인들을 대신해 강력팀 형사들이 들락거렸다.

유일한 단서는 이 사건의 목격자이자 또 다른 피해자로 알려진 한 남성의 진술. 이 남성은 경찰에 "덩치가 큰 남자 한 명과 작은 남자 한 명이 범인"이라고 말했다. 차 안에서 데이트를 하던 중 2인조 괴한에게 습격을 받았으며 이후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다고 했다.

경찰은 당초 부산 일대 불량배들이 이같은 짓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 들었다.

미제사건으로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 가던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년 10개월이 지난 1991년 11월 새 국면을 맞았다. 경찰이 당시 별건으로 임의동행한 최인철‧장동익 씨를 이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해 자백까지 받아낸 것이다. 사람들은 진범이 잡혔고 미제사건이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최 씨와 장 씨 두 사람이 피해 남성이 주장한 '키가 크고 키가 작은' 2인조 괴한이었다는 게 경찰의 판단이었다. 실제 이 두 사람은 한 명(최인철 씨)은 키가 크고, 나머지 한 명(장동익 씨)은 키가 작았다. 피해남성은 키가 작은 범인에게 달도 뜨지않은 한밤 중에 격투 끝에 제압당했다고 주장했지만 장동익 씨는 '시신경위축' 증상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군 면제 판정까지 받은 1급 시각장애인이었다.

두사람이 범인이라는 증거는 자백 뿐이었다. 이들은 일관되게 이른바 통닭구이, 물고문 등 경찰과 검찰의 가혹행위로 허위자백을 했다고 증언했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부산지법은 1992년 8월 최 씨와 장 씨 두 사람의 혐의를 유죄로 판단,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부산고법도 이듬해 1월 두 사람의 항소를 기각했다. 결국 그해 4월 대법원도 상고를 기각하면서 판결은 확정됐다.

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된 두 사람은 재판이 끝난 뒤에도 끊임없이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은 수사 과정에서 적법한 절차가 무시됐고 폭행과 강요에 의한 거짓 자백을 한 것이라고 했다. 2013년 모범수로 출소한 이들은 재심 전문 박준영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2017년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다 대검 과거사위원회가 지난해 4월 "경찰의 고문으로 허위자백이 있었고, 검찰은 이를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면서,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법원은 지난해 5월 재심 심문 절차를 개시했다. 이후 8개월 만에 재심 결정을 내리면서 사건은 또다시 새 국면을 맞게 됐다.

경찰과 검찰의 가혹행위로 낙동강변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21년 옥살이를 한 최인철 씨, 장동익 씨,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 등이 6일 부산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박준영 변호사 페이스북
경찰과 검찰의 가혹행위로 '낙동강변 살인사건' 범인으로 몰려 21년 옥살이를 한 최인철 씨, 장동익 씨,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 등이 6일 부산고법의 재심 개시 결정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박준영 변호사 페이스북

부산고법 형사1부(김문관 부장판사)는 6일 '낙동강변 살인사건'으로 21년간 옥살이를 한 최인철 씨와 장동익 씨가 제기한 청구를 받아들여 재심을 개시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는 "재심 청구인들을 수사한 수사관들과 검사에 의한 고문 등 가혹행위 및 허위공문서 작성이 다수 저질러 진 것이 법정에서의 개별 증거조사에서 증명됐다"며 "유죄의 증거가 된 서류가 일부 허위로 작성되었거나 일부 증언이 위증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30년 가까운 기간에 걸친 고문 피해의 호소에 일부라도 응답하게 된 것에 사과의 예를 표한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재심청구인들과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최인철 씨는 재심 결정 이후 "21년이란 긴 세월을 옥바라지 하느라 온갖 고생을 하며 기다려준 아내와 아비의 정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자식들과 가족들을 위해 법에 호소하게 됐다"며 "누명을 쓰고 범인이 아닌 범인이 되어 자식들에게는 살인자의 자식이란 오명으로 살게 했지만 이제 억울한 누명을 벗고 새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청 드린다"고 소감을 밝혔다.

장동익 씨도 "(수감 중)가족이 면회를 올 때면 가슴은 메어졌다. 살아 나가 우리 가족이 살인자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겠다고 각오했다"며 "21년 5개월 20일 살고 나오니 두 살 먹은 딸이 24살이 됐다"고 했다.

두 사람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변호사는 "(두 사람의 가족을) 살인범의 가족으로 만들 수 없었다"며 "우리가 진실을 찾으려는 이유다. 사랑하는 가족의 힘으로 '재심'이 가능했다"고 재심을 이끌어낸 소회를 밝혔다.

이 사건은 문재인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2심과 상고심 변론을 맡은 사건이라 더욱 눈길을 끈다. 문 대통령은 2016년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35년간 변호사 생활을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한이 남는 사건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재판부는 빠른 시일 내 공판준비기일을 잡고 신속히 재판을 진행할 계획이다.

now@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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