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법원] 낙태죄 폐지부터 김학의 무죄까지…'여성인권' 화두
입력: 2019.12.29 00:00 / 수정: 2019.12.29 00:00
<더팩트>는 2019년 각급 법원이 내린 판결 가운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판결·결정을 선정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더팩트DB
<더팩트>는 2019년 각급 법원이 내린 판결 가운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판결·결정을 선정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 /더팩트DB

아이돌 비극 뒤 소환된 '구하라 판결'…성인지감수성 확장한 '안희정 유죄'

[더팩트ㅣ송주원 기자] 2019년이 저물고 있다. 올 한해 법원은 4월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시작으로 여성 인권에 유의미한 판례를 여럿 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법원은 안희정(54) 전 충남도지사의 수행 비서 성폭행 사건에 유죄 판결을 확정하며 성범죄 사건 재판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했다. 고 구하라 씨가 생전 고통받았던 불법촬영 범죄를 제대로 단죄하지 못했다는 점, 6년 만에 법정에 선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에게 무죄 판결이 난 점 등은 논란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 '여성인권'을 화두로 만든 5개 판결을 꼽아봤다.

◆"마이 바디, 마이 초이스"…낙태죄, 역사 속으로

지난 4월 헌법재판소는 7년 전 위헌 결정을 뒤집고 낙태를 처벌하는 현행 법 조항에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관 9명 중 4명이 헌법불합치, 3명은 단순위헌, 2명은 합헌 의견을 내 헌법불합치로 최종 결정했다.

이로써 형법 269조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 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한다"는 자기낙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66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동의로 낙태 시술을 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한다는 형법 270조 '동의낙태죄' 조항도 재판관 9대7로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낙태죄는 태아 생명권이라는 공익에만 절대적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한다"며"자기결정권이 보장되려면 임신한 여성이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해 전인적 결정을 하고 결정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확보돼야 한다"고 밝혔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그동안 음지에서 위험한 낙태가 시술됐는데, 올해 헌재 결정으로 좀 더 안전한 환경에서 임신을 중단할 수 있게 됐다"며 "다만 중절 가능한 임신 주수를 한정하라는 취지의 결정이고, 특정 주수를 넘긴 임신 중단은 임부 몸에 큰 무리가 있어 적절한 개정안 마련에 총력을 기울일 시점"이라고 봤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남윤호 기자
헌법재판소가 낙태죄 위헌 여부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난 4월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낙태죄 폐지를 촉구한 시민단체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남윤호 기자

◆워싱턴포스트에 등장한 '구하라 판결' 판사

지난 8월 전 여자친구인 가수 구하라 씨를 폭행하고 사생활 영상으로 협박한 혐의로 기소된 최종범(28) 씨가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불법촬영 혐의는 "명시적 부동의가 없었다"고 봐 무죄로 판단했다.

최 씨의 1심 재판부였던 서울중앙지법 형사20단독 오덕식 부장판사는 불법촬영 외 상해·협박·재물손괴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실제로 영상을 유출, 제보하지 않은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형을 유예했다. 구 씨가 소속사 대표를 데려와 무릎을 꿇리라 강요하고, 실제로 한 기자에게 연락을 취했는데도 실형을 피해 공분을 샀다.

오 부장판사는 최 씨의 1심 선고를 내리기 꼭 1주일 전 고 장자연 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된 전 조선일보 기자에게도 "사건현장은 생일 파티 자리라 공소사실대로 성추행이 일어났다면 파티가 중단됐을 것"이라며 무죄를 선고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11월 구 씨가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오 부장판사의 판결은 더욱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됐다. 같은 달 워싱턴포스트(WP)에는 '대한민국 판사님'이라는 기고문이 실렸다. 저자인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강혜련 씨는 오 부장판사의 실명을 언급하며 "구 씨의 죽음은 한국 사법시스템이 여성을 좌절시킨 또 하나의 사례"라고 비판했다. 최 씨는 검찰과 본인 모두 항소해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장윤미 변호사는 "올 한해 불법촬영 범죄 재판을 살펴보면 아쉬움이 많다. 해외는 주로 실형을 선고하는데 한국 사법부 처벌은 '솜방망이'"라며 "특히 구하라 씨 사건처럼 연인관계임을 이용한 불법촬영 범죄가 많이 발생하는 만큼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어제 숨진 채로 발견된 가수 고 구하라의 일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25일 관계자가 조문객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어제 숨진 채로 발견된 가수 고 구하라의 일반 빈소가 마련된 서울 강남 성모병원 장례식장에서 25일 관계자가 조문객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피해자 다움' 깨뜨린 안희정 성폭행 유죄 확정

지난 9월 대법원은 수행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항소심에서 법정구속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실형을 확정했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업무상위력에의한간음 등 혐의로 기소된 안 전 지사 상고심에서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안 전 지사는 2017년 7월~2018년 2월 10차례에 걸쳐 수행 비서였던 김지은(36) 씨를 상대로 위력을 이용해 성폭력 피해를 입힌 혐의를 받는다.

대법원은 "피해자와 사건 관계자 진술 내용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적이고, 허위로 진술을 할 만한 동기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진술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하면 안 된다"는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처한 특별한 상황을 고려하고, 사회적 편견으로 형성된 '피해자다움'을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취지다. 성범죄 재판에 있어 성 인지 감수성을 판시한 첫 대법원 판례였다.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월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남윤호 기자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2월1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리는 2심 선고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남윤호 기자

◆검찰 부실수사·공소시효 만료에 풀려난 김학의

법원이 이른바 '별장 성 접대' 의혹이 제기된 지 6년 만에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놓고 첫 판단을 내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정계선 부장판사)는 지난 11월 검찰 과거사위원회 재수사 끝에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 전 차관의 공소사실을 모두 기각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건설업자 윤중천(58) 씨 별장에서 성 접대 사실이 인정됐지만 공소시효 완성으로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윤 씨와 사업가 최 모 씨, 전 저축은행 대표 김 모 씨에게 받은 3억 원대 뇌물 혐의도 증거 불충분이나 공소시효 만료 등 이유로 법의 심판을 피해갔다. 결국 검찰 과거사위 재수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6년 전 검찰이 '제 식구 감싸기'식 부실 수사를 했다는 의혹을 사실상 인정하고 뒤늦게 재수사에 착수했지만, 6년간의 수사공백에 법원도 별 도리가 없었다. 한상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만약 2013년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다면 분명히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았을 것"이라며 "검찰 부실 수사로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큰 범죄에 확실한 면죄부를 주고 말았다. 정말 안타까웠던 일"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37개 시민단체는 1심 선고 후 "거듭되는 수사에서 피해자의 인권은 외면당했다"며 "검찰은 수사권을 남용해 김학의와 윤중천 수사를 방해했다"며 검찰을 직권남용죄로 경찰에 공동고발하기도 했다.

뇌물수수 및 성접대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를 선고받은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이 지난 11월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
뇌물수수 및 성접대 혐의로 기소됐으나 무죄를 선고받은 김학의(63) 전 법무부 차관이 지난 11월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뉴시스

◆'진술 일관되고 무고 동기 없으면 신빙성' 확인한 '곰탕집 성추행' 판결

흐릿한 CCTV 영상이 전부인 '1초' 남짓 성추행 범죄가 유죄로 인정될까. 대법원은 이른바 '곰탕집 성추행' 사건의 피고인에게 유죄 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지난 12일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된 A(39) 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6개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지난 2017년 11월 A씨는 대전시 한 곰탕집에서 모임을 가진 뒤 일행을 배웅하던 중 옆을 지나가던 피해 여성 엉덩이를 약 1.33초간 움켜잡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하급심에서 A씨는 CCTV 외에 직접 증거가 없고 1초 남짓한 시간 추행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맞서왔지만 유죄가 선고됐고 결국 대법원 상고에 이르렀다.

대법원은 "피해자 진술의 주요한 부분이 일관되고 진술 내용에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며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안 전 지사 때와 마찬가지로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진술할 특별한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의심해서는 안된다고 다시 한 번 판시했다. 약 3개월 전 있었던 안 전 지사 판결과 유사한 이유였다. 이외에도 A씨와 피해자의 거짓말 탐지기 검사 결과, A씨의 진술 번복, 전문가들의 CCTV 영상 분석 등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ilraoh@tf.co.kr

발로 뛰는 <더팩트>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카카오톡: '더팩트제보' 검색
▶이메일: jebo@tf.co.kr
▶뉴스 홈페이지: http://talk.tf.co.kr/bbs/report/write
- 네이버 메인 더팩트 구독하고 [특종보자▶]
- 그곳이 알고싶냐? [영상보기▶]
AD
인기기사
실시간 TOP10
정치
경제
사회
연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