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F현장] 검사가 PPT에 '정의의 여신상'을 띄운 이유는
입력: 2019.11.22 00:00 / 수정: 2019.11.22 00:00
대법원에 전시된 정의의 여신상. /더팩트DB
대법원에 전시된 정의의 여신상. /더팩트DB

'사법농단' 이민걸 등 4명 10차 공판

[더팩트ㅣ서울중앙지법=송주원 기자] 진행 중인 재판 정보를 알아내도록 하급자에게 지시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민걸(58) 전 법원행정처 기소실장 등 법관 4명의 10차 공판. 피고인이 4명이라 변호인들은 방청석 앞줄까지 나눠 앉을 정도로 북적거렸지만 법정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의견진술을 위해 검찰이 띄워둔 PPT에는 정의의 여신상 사진이 크게 걸려 있었다. 검찰은 사법행정권의 정의와 목적을 설명하며 국민이 부여한 권한을 피고인들이 침해했다고 비판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윤종섭 부장판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이 전 실장과 이규진(57)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심상철(62) 전 양형위원회 위원, 방창현(46) 대전지방법원 부장판사의 속행 공판기일을 열었다.

이민걸 전 실장은 하급자에게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문건 작성을 지시하고 보고받은 혐의로 기소됐다. 이규진 전 위원은 통합진보당 재판이 진행되던 중 판결을 앞둔 재판부 심증을 파악하고, 헌법재판소를 견제한 양승태(71) 전 대법원장 기조에 따라 헌재에 넘어간 주요 사건 경과를 보고받은 혐의를 받는다. 심상철 위원 역시 이 과정에서 재판부 배당에 관여하고, 방창현 부장판사는 사건을 맡은 주심판사와 합의 없이 법원행정처 심의관과 판결문을 작성했다는 의혹이 있다.

증거조사 일부가 끝난 후 새롭게 쟁점을 정리할 필요성으로 잡힌 기일이었다. 검찰이 의견 진술을 위해 준비한 PPT의 첫 화면은 제목과 목차를 알리는 문구 하나 없이 구릿빛으로 빛나는 정의의 여신상 사진이었다. 스크린에 재판 10여 분전부터 띄워진 여신의 모습은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돼 피고석에 앉은 네 명의 피고인을 꾸짖는 듯 했다. 의견진술이 시작돼 화면은 넘어갔지만 검찰은 피고인들의 행위로 사법부 명예가 얼마나 실추됐는지 설명했다.

직권을 남용해 하급자의 권리행사를 방해했다는 혐의인 만큼 피고인의 직무 범위가 쟁점이었다. 검찰은 "헌법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법관의 독립과 사법적 책임을 보장한다. 이 두 가지가 조화롭게 달성되기 위해 국민은 사법행정권자에게 법관을 관리․감독할 권한을 부여했다"며 "사법행정권은 법관 독립성과 필연적으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사법행정권 행사가 필요한 경우 법관의 독립성이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법관 독립을 보장해야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 대법원이 일선 법관을 감시할 수 있다는 취지다. 다음에 이어진 검찰의 말은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피고인들의 행위는 사법행정권자가 갖는 의무와 상관없습니다. 피고인들은 사익을 위해 재판에 개입했습니다."

대법원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지난해 9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닫고 있다. /뉴시스
대법원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받고 있는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이 지난해 9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출석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입을 닫고 있다. /뉴시스

피고인 측 의견진술에 나선 변호인은 "대법원이 가진 권한은 법관의 인사와 법원 조직구성, 운영관리 등 일체적 법원 업무를 지원한다고 헌법에서 규정한다. 재판 개입이 사법행정권 남용인지 형법상 직권남용인지 유의해서 봐야 한다"며 "피고인들의 재판 개입이 직권 남용이라고 쳐도 당시 주심판사 역시 제도에 부합하는 업무 지시였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결국 직권남용죄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라고 반박했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사법행정권을 형법으로 다스릴 수 없어 남용 여부를 다투는 것부터 법리상 맞지 않다는 주장이다. 변호인의 반박을 듣던 검찰은 여지없이 잘라 말했다.

"피고인들은 검사가 남용된 직권 내용을 오해했다고 주장하는데, 사법행정권자가 법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권한 자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재판할거냐'며 자료를 빼돌리도록 법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시키고 사법부 신뢰를 침해한 것이 이 사건 공소 취지입니다."

검찰이 침해했다고 보는 '법관 독립성'을 간직한 채 재판을 심리했을 네 명의 피고인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규진 전 위원만이 헌법재판소를 견제하기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한 업무를 지시한 적 있냐는 재판부 질문에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같은 식구라는 생각이 강해 대법원과 분리된 기관이라는 인식이 부족했다. 헌법재판소보다 우위를 점하기 위해 어린 아이 같은 짓을 한 건 아니다"라고 답했을 뿐이었다.

이 전 실장 등 4명의 11차 공판은 28일 오전 10시에 속행된다.

ilraoh@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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