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이 특정 성향 판사들에게 불이익을 준 정황이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대법원 전경 /남용희 기자 |
'사법농단' 제46회 공판…'양승태 비판 판사' 인사 불이익 정황 공개
[더팩트ㅣ장우성 기자] 대법원은 법관의 신상·인사정보와 근무이력을 모아놓은 '법관인사전자관리시스템'을 운영한다. 모든 판사 인사와 평가에 기본이 되는 데이터를 집대성한 공간이다. 학생생활기록부(생기부)의 법관 버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시스템은 각 법관별로 '메모란'을 뒀다.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입력한다. 축적된 정보만 해도 충분한데 굳이 메모란을 만들어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이야기를 써넣는 목적은 아닌 듯한 인상이 짙다.
2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박남천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박병대 전 대법관, 고영한 전 대법관의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 제46회 공판에서 그 '메모란'이 처음 공개됐다.
이 메모들은 2017년 3월 이탄희 전 판사의 사직서 제출을 계기로 '사법부 블랙리스트' 존재 의혹이 제기된 직후 시스템 상에서 삭제됐다. 검찰은 법원행정처 판사들의 이메일 압수수색에서 이 메모란에서 특이사항만 정리해놓은 엑셀 파일을 발견했다. 자칫하면 영영 수수께끼로 묻혔을 내용이다.
이날 법정에서 검찰이 증거로 제시한 한 판사의 메모란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다.
'국제인권법연구회 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인사모) 창설에 주도적 역할. 인사모는 전문분야인 국제인권법과 관련성 있다고 보기 어려워 부적절함.'
이밖에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의 사법행정에 비판적이었던 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에 관계된 주요 법관의 메모란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핵심멤버', '인사모 창립멤버' 등의 내용이 빠지지 않았다.
인사관리시스템을 운영한 인사총괄심의관실은 2016년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 대응방안'이라는 보고서도 작성했다. 이 보고서는 "인사모는 문제상황의 핵심"이라며 해결책으로 "인사모 폐지+(국제인권법)연구회 정상화"라고 제시했다. 이를 위해 검토한 실행방안은 이랬다.
'인사모 등 핵심회원에게 선발성 인사. 해외연수 등에서 불이익 부과→법관사회 내 꺼리낌 증가', '부정적 성격 부여-비핵심 그룹 이탈 유도'
보수 성향 언론사와 협조해 인사모 비판 기사를 내도록 한다는 등의 언론 활용 방안도 등장했다. '우리법연구회 핵심멤버 주축', '긴급조치, 병역법 위반 등 튀는 판결 주도'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는 방안도 제안했다.
'사법농단 의혹' 정점으로 지목돼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보석을 허가받은 지난 7월 22일 오후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를 나서고 있다./남용흐 기자 |
2015~2017년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 근무하면서 이같은 보고서 작성에 관여한 노모 서울남부지법 판사는 이날 증인으로 출석해 당시 법원행정처가 인권법연구회와 인사모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드러냈다.
노 판사는 "판사들은 국제인권법 연구에 매료돼 연구회에 가입하는데 우리법연구회의 명백을 잇기 위한 인사모를 소모임으로 만든 것은 기만적"이라는 취지로 증언했다. 말하자면 순수하게 인권법을 연구해야 하는 모임에서 당시 사법행정을 비판하는 활동을 한 것은 부당하다는 설명이다. 검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캐물었다.
"법관윤리강령을 어긴 것도 없는데 인사모 회원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줘도 되는가."(검사)
"2009년 우리법연구회 대응문건은 수위가 더 셌다. 그것을 참고했고 오히려 톤다운했다."(노 판사)
"인사권 남용에 법률 위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검사)
"꼭 이렇게 실행하자는 게 아니라 (인사모가) 문제가 있으니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담아보자는 것이었다."(노 판사)
인사총괄심의관실은 2016년 4월 사법행정위원회 위원으로 추천된 법관의 인사검증도 맡았다.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기본 자료를 주고 인사총괄심의관실이 보강하는 식이었다.
그중 소장 판사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개설한 홍모 판사의 검증 내용에는 '우리법연구회 핵심그룹. 강성'이라고 적혔다. 이밖에 '사법행정에 협조적', '조직 적합성이 뛰어남' 등의 평가를 받은 후보 법관도 있었다.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작성한 문건 중 가장 논란이 된 것은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다.
애초 대법원은 비위 사실이 있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법관을 '물의 야기 법관'으로 별도 관리해왔다. 여기에 인권법연구회 주요 회원 등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비판적인 성향의 법관들도 포함시켰다.
송모 부장판사는 이른바 '격오지'로 분류되는 한 지방지원에서 근무했다.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도 2015년 법원전산망 '코트넷'에 양승태 대법원장이 추천한 권순일 대법관을 비판하는 글을 올린 괘씸죄라는 해석이 많았다. 격오지 근무 판사는 이후 인사에서 선호 법원을 배려해주는 게 인사 원칙이다. 그러나 송 판사는 2017년 평정에서 A그룹에 속하고도 본인이 희망한 법원에 배치받지 못 했다. 그는 옛 우리법연구회 핵심 멤버이기도 했다.
2014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무죄판결을 공개 비판하는 등 사회적 발언을 계속해온 김모 부장판사는 '조울증' 환자로 기재됐다. 그러나 인사총괄심의관실은 당시 근거없는 추측일 뿐인 이같은 병명을 실제 확인하지도 않고 문건에 넣은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재경지법에 근무할 차례에 다시 경인지역 지법으로 인사가 났다.
"헌법은 법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필요하면 법관징계법에 규정된 사항에 따라 견책 등 정해진 징계만 가능하다. 또 본인의 의견진술 절차를 거쳐야 한다. 희망지 배제 등 인사조치를 취하면서 절차가 있었는가."(검사)
"해명 기회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아쉽다."(노 판사)
양승태 대법원에 비판적이었던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들이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정황도 드러났다. /남용희 기자 |
노 판사는 인권법연구회나 인사모 회원 판사들을 특별히 관리하라는 상부의 지시는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은 다른 실국과 달리 법원행정처 차장 직속 조직이다. 보고라인은 차장-법원행정처장-대법원장으로 이어진다. 인사 정책 결정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이날 피고인석의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증언이 이어지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leslie@tf.co.kr